
주기도문 강해: 율법의 칼날을 꺾고 타인을 해방하는 은혜의 복음주의적 다이내믹스
빅토르 위고의 불후의 명작 『レ ミ제라블(레 미제라블)』에서 죄의 사슬에 묶여 평생을 도망치던 한 인간을 근원적으로 거듭나게 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의 도정으로 이끈 것은, 죄의 유무를 자로 재듯 들이대던 법전의 차가운 판결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밀려오는 정죄와 보복의 손길을 단숨에 멈춰 세운 미리엘 주교의 압도적이고 신비로운 은혜의 시선이었습니다. 은촛대를 품에 안은 채 칠흑 같은 밤길을 나서는 장발장의 뒷모습은,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용서란 결코 범죄의 사실을 단순히 지워주거나 눈감아주는 값싼 타협이나 도덕적 관대함의 수준이 아님을 웅변합니다. 용서란 한 인간을 얽매던 과거의 어둠을 송두리째 파쇄하고, 그를 영원한 생명의 새 길로 돌려세우는 초자연적인 천국의 권능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강해 설교 속에서 선포되는 주기도문의 핵심 구절,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위대한 선언을 붙드는 신학적 자리도 바로 이 거룩한 은혜의 지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기독교의 온전한 기도란 인간이 지상에서 필요한 물질이나 탐욕의 목록을 신에게 당당하게 청구하여 얻어내는 세속적 도구가 결코 아닙니다. 기도는 도리어 십자가 앞에 내 자아를 쳐서 복종시킴으로써 하나님의 광활한 사랑의 마음을 배우고, 오랫동안 타인을 향해 겨누고 있던 내 손의 날카로운 돌멩이를 스스로 내려놓게 만드는 눈물 어린 믿음의 여정입니다.
이 깊이 있는 설교는 용서라는 거룩한 과제를 인간의 불완전하고 가변적인 감정의 영역에만 가두어두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이 가진 신성한 배열 순서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가장 먼저 구해야 하는지, 우리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떠한 분이신지, 그리고 하늘로부터 거저 받은 무조건적인 은혜가 어떻게 내 곁의 이웃을 향해 수평적으로 흘러가야 하는지를 매우 차분하고도 명징하게 정조준합니다. 그렇기에 주기도문을 통한 용서의 묵상은 단순히 복잡한 이 인간관계 속에서 상처받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이나 심리적 위로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온율법의 완성인 복음의 가장 깊은 심장부,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체성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영원한 생명의 문입니다.
1. 지상의 양식에서 천국의 면죄로 도도히 흐르는 영적 구속사
주기도문의 서사는 결코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적 필요나 물질적 결핍을 무조건 부인하거나 영지주의적으로 무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기를 구하게 하신 직후, 곧바로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일용할 양식”을 하늘 아버지께 구하라고 자상하게 가르치십니다. 이 땅 위에서 먹고사는 일상의 고단한 문제는 신앙의 영역 바깥에 내팽개쳐진 사소하고 세속적인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인 돌보심과 통치 아래 전적으로 맡겨야 할 우리의 실제적인 삶 그 자체입니다. 자식이 떡을 달라고 구하는데 차가운 돌을 던져주지 않으시며, 생선을 달라고 소망하는데 치명적인 뱀을 쥐여주지 않으시는 하늘 아버지의 선하심과 자비로운 마음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그것이 바로 기독교 기도의 가장 단단한 바탕이자 기초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의 위대한 말씀의 흐름은 땅의 양식을 구하는 결핍의 자리에서 결코 머물거나 멈춰 서지 않습니다. 육신의 배를 채울 양식을 구했던 성도의 입술은, 숨 가쁘게 곧바로 타인의 죄를 사해주고 나의 죄를 사함받는 영적인 용서의 제단 앞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주기도문 속에 내재한 이 필연적인 구속사적 순서를 매우 무겁고 중요하게 읽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생명을 유지하도록 우리 입에 거룩한 양식을 먹이셨다면, 그 육신의 생명은 결코 누군가를 향한 증오를 키우고 시기와 보복의 세월을 연장하는 악한 도구로 쓰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공급받은 일용할 양식은 나로 하여금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근원적인 은혜를 기억하게 만드는 매개체이며, 그 은혜를 깨달은 영혼은 마땅히 내 곁에서 나에게 빚진 자들의 사슬을 풀어주는 사랑의 확산으로 흘러가야만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의 도도한 흐름은, 하나님을 단지 인간이 부르짖을 때마다 기계적으로 응답이나 던져주는 종교적 자판기나 얄팍한 대상자로 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필요와 연약함을 구하기 전부터 이미 불꽃 같은 눈동자로 다 알고 계시면서도, 그 사소한 필요들을 당신의 거대하고 영원한 구원의 뜻과 경륜 안에 배치하시는 주권적인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단순히 배부른 번영을 갈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 오늘 나에게 허락하신 이 생명과 양식을 가지고, 내가 과연 하나님 나라 안에서 어떠한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까?”를 뼈아프게 질문하는 사명자의 기도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이토록 영혼의 심연을 흔들며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인간이 본래 스스로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 늘 정욕과 이기심에 눈이 멀어 있는 비참하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도우심과 조율하셨던 은혜가 없다면, 인간의 기도는 순식간에 탐욕의 바구니를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욕망의 목록으로 타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렇기에 주기도문은 단순히 주일禮拝(예배) 때 습관적으로 읊조리는 암송문을 넘어, 우리의 일그러진 기도의 질서와 삶의 체질을 송두리째 뜯어고치시는 복음의 거룩한 학교입니다. 무엇을 가장 먼저 구하여 영혼의 뼈대를 세우고, 내 손에 쥐고 있던 어떤 욕망과 집착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엄숙한 훈련장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설교는 방언과 통변 같은 신비롭고 외적인 은사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진정으로 깨달은 신실한 마음과 이성으로 드리는 영적 기도의 중요성을 함께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9절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일만 마디의 알아듣지 못하는 현란한 영음보다, 회중을 깨우치고 자기 영혼을 세우는 깨달은 마음의 다섯 마디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합니다. 주기도문은 바로 그러한 영적 진리가 압축된 ‘다섯 마디’의 무한한 깊이를 품고 있는 기도의 정수입니다.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없는 이 짧은 몇 개의 문장 안에, 하나님의 우주적 영광과 영원한 나라, 육신의 양식, 그리고 인간 사회의 가장 고질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죄 사함과 수평적 용서의 거룩한 천국 질서가 완벽한 삼차원의 구조로 녹아들어 있습니다.
2. 돌을 든 율법의 법정 앞에서 내려지는 십자가의 면죄부
요한복음 8장에 기록된 간음한 여인의 뼈아픈 현장 속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군중들은 시퍼런 율법의 문자를 앞세워 저마다 손에 묵직한 돌멩이를 든 채 붉은 눈을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던진 서슬 푸른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현장에서 붙잡힌 한 가련한 여인의 비참한 생사 여부를 묻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 내면은 어떻게 대답해도 올무에 걸려들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잔인하게 시험하고 고발하려는 종교적 함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들의 살기 어린 재촉에 휘말려 성급하게 인간적인 판결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묵묵히 몸을 굽혀 침묵 속에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신 뒤, 인류의 양심을 관통하는 위대한 한 문장을 던지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거룩한 한마디의 선언 앞에서, 기세등등하게 돌을 치켜들었던 군중들은 비로소 타인의 허물만을 난도질하던 눈을 돌려, 자신들의 어두운 내면 깊은 곳에 또아리 틀고 있던 추악한 죄악의 실상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든 이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툭툭 떨어뜨리며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경이로운 구원의 장면에서 드러나는 용서의 은질은, 결코 죄라는 무거운 실체를 가볍게 여기거나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는 식의 도덕적 방임주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비참하게 떨고 있는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압도적인 면죄를 선포하신 직후, 반드시 공의의 요청을 덧붙이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주님은 서슬 푸른 정죄의 사슬을 끊어 그녀를 영원한 자유자로 떠나보내시지만, 그녀가 이전에 허덕이던 부패하고 추악한 죄의 구렁텅이로 다시 기어 들어가도록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참된 은혜는 성도가 마땅히 드려야 할 통회하는 회개를 지워버리는 가짜 위로가 아니라,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삶의 체질을 바꿀 수 있도록 그의 꺾어진 무릎을 초자연적인 힘으로 다시 세우는 재창조의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본 설교가 선포하는 용서의 진정한 의미는, 내 마음에 묶여 있던 억울함의 매듭을 풀고 타인을 내 영혼의 감옥에서 완전히 석방하여 떠나보내는 위대한 결단입니다. 그것은 내가 전적으로 옳다는 인간적인 확신과 얄팍한 자존심만으로 누군가를 내 마음의 법정에 피고인으로 묶어두고 채찍질하던 오만한 태도에서 완전히 탈옥하는 일이며, 거룩하신 하나님 보좌 앞에서 나 역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없었다면 영원한 파멸에 처해졌을 사함 받은 비참한 죄인에 불과함을 매 순간 떨림으로 기억해 내는 일입니다.
문자적인 율법은 인간의 가슴속에 숨겨진 죄를 들추어내어 정죄의 낭떠러지로 밀어버리지만, 은혜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그 율법이 본래 지향하고 있던 가장 깊은 종착지인 ‘사랑을 통한 생명의 구원’으로 인생들을 부드럽게 견인하십니다. 천국의 복음은 누가 더 정교하고 정당하게 죄인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는가 하는 정죄의 기술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도리어 타인을 향해 부러뜨리려던 손의 돌멩이를 조용히 내려놓고, 피 흘려 죽어가는 죄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십자가의 손길에서 그 찬란한 영광을 드러냅니다.
이때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결코 악을 묵인하거나 무책임하게 죄를 방치하는 무질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육신을 군중의 돌날로부터 구원하시되, 그녀가 가슴속에 죄를 계속 품은 채 방탕하게 살아가라고 권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의 용서가 온 천하를 치유하는 참된 은혜가 되는 까닭은, 죄인이 과거에 저지른 실패와 허물을 그 사람의 존재를 규정하는 최종 판결로 삼지 않으시면서도, 동시에 그 사람을 향해 향기로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거룩의 좁은 길’로 초청하시기 때문입니다. 피 묻은 십자가 복음의 진정한 얼굴은, 뼈를 깎는 정직한 회개와 생명의 온전한 회복이 은혜의 한 이불 아래서 함께 입 맞출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3. 정죄의 저울을 파쇄하고 흐르는 일만 달란트의 면죄학
모든 인간 사회의 법률과 율법은 본래 끝없이 폭주하려는 인간의 잔인한 폭력을 제어하고, 악한 죄를 객관적인 죄로 드러내어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순기능적 역할을 담당합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법(Lex Talionis)의 원리는, 언뜻 보기에는 매우 잔혹해 보이지만, 실상은 인간의 분노와 보복의 크기가 무한대로 증폭되어 공동체를 파멸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가해진 공의로운 형평성과 최소한의 법적 안전장치였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세워놓은 그 상식과 형평성의 경계선을 넘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거대한 은혜의 지평을 열어젖히십니다. 한쪽 뺨을 부당하게 맞았을 때 분노로 되갚는 대신 도리어 다른 편 뺨까지 돌려대며,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부당하게 핍박하는 자의 요구를 넘어 기꺼이 십 리까지 함께 동행해 주라는 주님의 급진적인 산상수훈의 말씀은, 세상의 계산법인 보복의 균형추를 완전히 깨부수고 흐르는 무한한 천국 은혜의 세계를 계시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인류의 구속사적 흐름을 무법(無法)의 시대, 율법(律法)의 시대, 그리고 마침내 도래한 은혜(恩惠)의 시대라는 웅장한 삼차원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풀어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은 자신의 마음에 도사린 시기와 분노의 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통제되지 않는 증오에 사로잡혀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무법의 비극을 낳았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상대방에게 비열하게 책임을 전가하며 손가락질했던 서글픈 모습처럼, 타락한 인간은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의 허물은 철저히 감추고 타인에게 받은 상처는 몇 배로 되갚으려는 악한 본성을 공유해 왔습니다. 율법의 칼날은 인간의 내면에 깊이 고여 있는 그 지독한 어둠을 가차 없이 들추어내어 고발하지만, 주님의 은혜는 그 사망의 어둠 속에 주저앉아 신음하는 죄인들을 사랑의 음성으로 불러내어 영원한 생명의 빛 가운데로 걸어 나오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18장에 기록된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의 비유는, 은혜를 망각한 인간의 영적 치명상을 가장 날카롭고 예리하게 찌르는 복음의 거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우주적인 죄의 빚(일만 달란트)을 임금에게 단번에 거저 탕감받은 종이, 길을 가다 자신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이라는 사소한 돈의 빚을 진 동료의 덜미를 잡고 옥에 가두며 결코 놓아주지 않는 비정한 모습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줍니다.
이 어리석은 종의 치명적인 문제는 산술적인 계산 능력이 부족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주권자로부터 받은 그 어마어마한 면죄의 은혜의 크기를 영혼의 망각 속에 새까맣게 잊어버린 굳어버린 마음에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보좌 앞에서 내 모든 추악한 죄악을 먼저 조건 없이 사함받은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내 마음에 차지 않는 타인을 향해 끝없는 정죄와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만을 쉴 새 없이 휘두르고 있다면, 그는 비록 주기도문의 문장들을 매일 유창하게 외우고 있을지언정 그 기도가 품고 있는 예수의 심장 속에는 단 한 걸음도 걸어 들어가지 못한 불쌍한 종교인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 20장에 등장하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 역시, 계산기만 두드리는 우리의 이기적인 양심을 향해 동일하고도 묵직한 영적 질문을 던집니다. 날이 저물어 마감 한 시간 전에 들어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게으른 노동자에게까지, 아침 일찍 들어와 뼛속까지 타들어 가는 더위를 견딘 자와 동일한 한 데나리온의 온전한 삯을 베풀어주시는 포도원 주인의 파격적인 자비는, 세상의 철저한 공로주의와 인과율의 저울에 익숙한 인간의 눈에는 몹시 불편하고 불공평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적인 불편함은 결코 포도원 주인이 불의하거나 악해서 생기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바라볼 때조차, 오만하게도 자기 자신이 흘린 땀방울과 공로라는 이기적인 몫의 저울로만 천국의 신비를 재단하려 들기 때문에 발생하는 영적 질병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구원은 인간이 쌓아 올린 자격이나 공로의 유무를 따지는 얕은 물가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인간의 자격을 초월하여 흐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과 마르지 않는 은혜의 깊은 바다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본 설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가진 처절한 현실적 무게와 어려움을 결코 값싸게 포장하거나 숨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부당한 폭력과 깊은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을 향해, 아무런 아픔도 없는 것처럼 바보처럼 웃으며 괜찮은 척 위선을 떨라는 얄팍한 도덕적 훈계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도리어, 내 삶에 가해진 상처에 대해 세상의 법정보다 더 잔인하게 되갚아 주려던 인간적인 ‘보복의 권리’를, 내 인생의 최종적인 언어이자 결론으로 삼지 않겠다고 십자가 앞에 위대하게 선언하는 믿음의 초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거저 받은 죄 사함의 크기가 얼마나 우주적으로 거대한지를 매 순간 떨림으로 기억해 낼 때, 내 곁의 형제가 나에게 저지른 작은 허물과 데나리온의 빚을 끝까지 붙들고 그의 목을 죄며 내 영혼의 방을 증오의 감옥으로 가두는 행위가 얼마나 모순되고 비참한 일인지가 비로소 영적인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용서란 내 상처 입은 감정이 먼저 다 치유되어 편안해졌기 때문에 비로소 베풀 수 있는 인간적인 넉넉함이 아닙니다. 용서는 오직 나를 살리신 십자가의 은혜를 명확히 아는 믿음이, 감정의 폭풍 속에서도 말씀의 권위 앞에 무릎 꿇으며 묵묵히 먼저 내딛는 초자연적인 순종의 첫걸음입니다.
4. 사함 받은 영혼의 실존, 가인의 길을 역류하는 종말론적 화목
장재형 목사의 강해 설교는 주기도문이 선포하는 용서의 도정을, 한 개인의 마음 수련이나 착한 성품을 길러내는 소박한 도덕주의적 차원으로 결코 좁혀 보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 중심에 도사린 고질적인 교만과 시기, 끓어오르는 분노와 미움의 죄성이 복음의 능력으로 근원적으로 치유되지 않는다면, 인류가 그 어떤 정교한 법률을 제정하고 인공지능과 과학기술을 눈부시게 발전시킨다 할지라도 이 지구상에 참된 평화와 에덴의 기쁨은 단 일 센티미터도 구축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외적인 문명과 세상이 아무리 현란하게 빨라지고 변화된다 할지라도, 인간의 속사람이 십자가 복음 앞에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인류는 여전히 동생을 쳐 죽였던 가인의 잔인한 길과, 자신의 허물을 타인에게 돌리던 아담의 비열한 변명의 장막 속을 영원히람쥐 쳇바퀴 돌듯 맴돌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영원한 복음의 권능은 겉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의 환경을 리모델링하기 전에, 먼저 우리 내면에 견고하게 들어서 있는 증오와 정죄의 거친 법정의 판사 의자부터 피 묻은 십자가로 완전히 박살 내고 뒤엎으십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인간처럼 상하(上下)와 좌우(左右), 그리고 전후(前後)라는 차원의 시공간에 갇혀 한 단면만을 바라보시는 유한한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온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가장 깊고 은밀한 심장 속 생각까지 한눈에 불꽃 같은 눈동자로 통찰하시는 절대자이시며, 동시에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거대한 사랑의 명사 자체이십니다.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삶의 실제 속에서 진정으로 알고 믿는다는 것은, 내가 현실 속에서 겪는 억울함과 나 자신의 얄팍한 판단력을 세상을 심판하는 최종적인 절대 기준으로 삼지 않겠다는 전인격적인 항복을 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운 통치를 내 모든 삶의 중심에 단단히 모셔 들일 때, 우리는 나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원수 같은 사람을 무책임하게 세상의 불의 속에 방치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가련한 영혼을 내 마음에 묶어두고 영원한 파멸과 정죄의 감옥 속에 가두어두지 않는 복음주의적 지혜와 십자가의 넓은 길을 비로소 배우게 됩니다.
로마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눈물로 권면했듯이, 믿음이 강한 자와 영적으로 약한 자가 서로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않는 거룩한 태도 역시 이 위대한 은혜의 주권 사상과 깊게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간의 신앙적 차이나 영적 미숙함을 논할 때조차, 성도는 언제나 나 같은 죄인을 먼저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 주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그 큰 은혜를 입은 인간이 마땅히 보여야 할 신실한 순종의 응답을 동시에 가슴 떨림으로 기억해야만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에서 눈부시게 드러나듯이, 죄인을 향해 두 팔을 벌려 달려가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용서의 넓이는 늘 인간이 고안해 낸 좁은 계산기와 종교적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어 저 멀리 드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 신성한 은혜의 무한한 넓이를 도무지 알지 못하는 굳어버린 큰아들의 마음은, 정작 자신도 아버지의 집에서 모든 풍요를 거저 누리고 있으면서도,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동생을 향해 조건 없이 부어지는 아버지의 압도적인 은혜의 잔치 앞에서 불평과 시기의 쓴 뿌리를 쏟아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참된 신앙의 가치는, 주기도문의 거룩한 문장들을 박물관의 박제된 교리처럼 구경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거친 실제 관계 속에서 이 말씀을 피 묻은 발자국으로 다시 살아내는 치열한 분투에 있습니다. 내 영혼 깊은 곳에 여전히 억울함과 분노의 앙금이 시퍼렇게 남아 있는 사역의 자리, 타인을 향한 편견과 인간적인 판단이 굳은살처럼 빠르게 굳어버리는 관계의 자리, 내 기준과 자존심을 앞세워 상대방의 존재를 끝내 외면하고 영원히 가차 없이 버리고 싶은 처절한 한계의 자리에서, 주기도문은 세상을 향해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전혀 다른 천국의 길을 열어젖힙니다. 그 길은 결코 힘이 없는 약자가 어쩔 수 없이 현실 앞에 굴복하는 비겁한 체념이나 굴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먼저 우주적인 사랑과 면죄를 부여받은 자유인만이 당당하게 선택할 수 있는 영혼의 거룩한 특권이자 영광스러운 해방의 걸음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우리가 매일 입술로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몇 개의 짧은 종교적 문장 단어들의 조합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십자가 앞에서 새롭게 선택하고 목숨 걸고 걸어가야 할 실존적인 삶의 최종 방향성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영원한 나라의 도래를 온 마음으로 갈망하고, 매 순간 하늘로부터 생명의 일용할 양식을 겸손히 공급받으며, 마침내 그 양식이 주는 영적인 새 힘을 가지고 내게 상처 준 누군가를 조건 없이 용서하고 풀어주는 거룩한 사명자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영원한 면죄를 부여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타인을 정죄하고 피 흘리게 만드는 사단의 어두운 법정 속에 더 이상 단 한 순간도 안주하며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깨어진 세상을 치유하고 화목하게 만드는 십자가의 길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숨결과 영원한 생명의 향기를 온 천하에 천둥처럼 뿜어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그대와 내가 드리는 거룩한 주기도문의 청원은, 지금 내 마음의 감옥 속에 과연 누구를 사슬로 꽁꽁 묶어두고 채찍질하고 있으며, 또 누구를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의 권능 안에서 온전히 풀어주어 해방하고 있습니까?
주기도문의 이 준엄하고도 자비로운 ‘면죄의 저울’ 앞에 당신의 영혼을 정직하게 세워둘 때, 현재 당신이 눈물로 파수하고 있는 사명의 제단이나 가정, 혹은 사역의 현장 속에서 “나에게 상처 준 저 사람만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며 합리화의 방패 뒤에 숨겨둔 채 움켜쥐고 있는 ‘보복의 돌멩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일만 달란트의 죄 빚을 지고 날마다 파산하던 비참한 자아를 그리스도의 피로 거저 살려내신 하나님의 우주적인恩惠(은혜)를 기억해 낼 때, 당신은 어떻게 인간의 자존심과 판단을 내려놓고, 그 가련한 지체를 정죄의 감옥에서 풀어주어 함께 하나님 나라의 화목한 연회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종의 좁은 문을 선택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