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자 가장 절정에 이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19장 18절부터 이어지는 본문은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오르셔서,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처절하게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전해준다.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이는 예수님이 세상 죄인들 한가운데서 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시는 구속 사역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강도들 사이에 놓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수치스럽고 비극적인 자리에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사건이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며 동시에 깊은 영적 함의를 지닌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대목을 해석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결코 단순한 ‘패배’나 비극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본문에서 빌라도가 쓴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어로 걸어 두었다는 점은, 당시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헬라인과 로마인에게도 이 소식이 전파될 수 있도록 주권적인 섭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는 예수님이 단지 유대인만의 왕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예표적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강조하며,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특정 민족이나 특정 계층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역설한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공포한 빌라도의 판결문은, 역설적이게도 빌라도 자신의 의도와 달리 예수님의 위엄과 참된 정체성을 공표하는 결과를 낳았다.
빌라도의 판결문이야말로, 비록 예수님을 정치적 혹은 소요죄로 몰아 십자가형에 넘긴 빌라도가 범한 ‘무죄한 이를 죽인’ 엄청난 죄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떻게든 고수하려 했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제가 사실상 예수님의 진짜 정체성이었음을 드러낸다. “내가 쓸 것을 썼다”라고 단언한 빌라도의 태도는,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그가 몰랐던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드러내는 데 쓰인 일종의 ‘도구’였다고도 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아이러니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인간 역사 가운데 드러나는 우연처럼 보이는 순간들이나 권세자들의 오만한 결정조차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방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여기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처럼 “유대인의 왕”이라 공표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진 수모와 고통을 당하시며 세상 죄를 대신 지셨다. 제자들조차 대부분 도망가고, 남아 있었던 이들은 몇 안 되는 여인들과 사랑하는 제자 요한뿐이었다. 이에 반해 로마 군병들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유품을 약탈하듯이 나누어 가졌고, 특별히 예수님의 마지막 소유였던 ‘통으로 짠 옷(속옷)’마저도 제비뽑기를 하며 차지하려고 애썼다. 이는 겉으로는 사형수에게 남은 마지막 물건을 빼앗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탐욕’을 보여 주는 극명한 사례다. 주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비우셨지만, 반대로 세상은 예수님의 마지막 남은 옷가지마저도 나누어 갖겠다고 다투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이 교회의 현실과 그리스도인의 내면을 점검하게 만드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교회와 성도라고 해서 항상 십자가 앞에서 겸손하고 자기부인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때로는 세상의 방식대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더 높은 지위와 명예를 차지하려는 경쟁심을 드러낼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9장에 등장하는 로마 군병들의 탐욕스러운 모습은 고대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경고로 들려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에게 자신을 성찰하라고 촉구한다.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그분의 고난과 자비를 깊이 묵상하기보다, 여전히 세상적인 목적을 채우기 위해 믿음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곁에 서 있었던 네 여인은 겁에 질려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주님의 고통을 지켜보며 함께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 현장은 단순히 슬픔을 넘어, 로마 병정들이 경계하고 무자비하게 사람을 처형하던 무서운 장소였지만, 이 여인들은 십자가를 붙들고 예수님을 사랑으로 지켜보았다. 베드로처럼 겁에 질려 도망칠 수도 있었음에도, 그들의 사랑은 두려움을 이겼다. 이는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중요한 본이 된다. 십자가의 길은 고통이 뒤따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그 길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여인들의 헌신이야말로 교회가 본받아야 할 용기와 사랑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남성 제자들이 도망간 자리에 남아서, 가장 처절한 순간까지 동행했기 때문이다.
이 본문을 묵상하면, 왕이시면서 동시에 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는지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여러 번 자신의 정체성을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로 암시하셨다(요 10장 참조). 실제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내어주며, 자신이 마지막으로 입고 있었던 속옷마저 빼앗기는 상황에 이르셨다. 온 세상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결코 이 땅의 도덕적 선행 수준을 넘어선다. 그것은 죄인에게 베푸신 완전한 희생이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직접 보여 주신 가장 극적인 구속사적 사건이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이 가장 위대한 왕이심과 동시에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신 종의 모습이라는 이 ‘아이러니’를 깊이 묵상하도록 초대한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입으신 속옷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고 요한이 특별히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에 제사장이 입던 옷의 형식을 상기시킨다. 옛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거룩함을 상징하는 독특한 의복을 갖추어 입었는데, 이 옷이 말하는 의미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온전한 봉사’였다. 예수님의 속옷이 통으로 짜여져 있었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참된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한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죽으셨음을 암시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설파한다. 이는 예수님이 겉으로 보기에 초라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셨지만, 영적인 차원에서는 가장 존귀한 사명을 완성하는 장엄한 순간이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그 옷을 제비뽑아 차지하는 로마 군병들의 모습은, 인간의 추악한 욕심과 무관심을 대조적으로 비춰 준다.
이처럼 십자가 위에서 벌어진 군병들의 제비뽑기는, 예수님을 향한 완악한 무관심과 세속적 욕망의 극치를 보여 준다. 탐욕에 물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보지 못하고, 심지어 그분이 지니신 마지막 옷조차도 이익으로만 여긴다. 이는 은혜를 가장 필요한 순간에 거절하는 행위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르게 묵상하는 이들에게, 이 장면은 한없이 충격적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표징이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그 어떤 것도, 이미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주심으로써 구원을 이루셨다. 그렇기에 그분이야말로 탐욕과 소유욕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열쇠이자, 거룩한 본보기다.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내리게 된 ‘유대인의 왕’이라는 공식적인 명칭과,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신 예수님의 모습은 기묘한 역설을 형성한다. 왕이면서도 다 버리신 분, 거룩한 대제사장이면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죄수의 죽음을 당하신 분,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면서도 스스로 사람들 틈에 끼어 조롱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영적 역설이야말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복음의 정수라고 설명한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패배가 아니라 궁극적인 승리였으며, 동시에 온 인류를 향한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십자가 신학의 핵심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셨고,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보여 주는 “The Crucified God(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이미지는, 선교와 목회 현장에서 크리스천들이 품어야 할 핵심적인 가치와 정체성을 반영한다. 더 많은 것, 더 나은 것, 더 편한 삶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교회와 성도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는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 있다. 그것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며, 바로 그 길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심과 교만, 세상의 헛된 욕망들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함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항상 십자가 아래로 돌아가 그 현장을 생생히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마지막 속옷을 놓고 벌어진 로마 병정들의 제비뽑기는 나와 무관한 과거의 야만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임을 자각하게 만든다. 십자가를 ‘소유와 탐욕’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려는 세속적 기획에 스스로가 물들지 않았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무것도 남김없이 다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신앙을 일으켜 세우고, 주님 닮아 가기를 갈망하게 만든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교회가 세상 속에서 생생히 드러내야 할 것은 ‘무소유’나‘금욕’을 넘어서서, 필요한 곳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고 고난에 동참하는 사랑의 실천이라고 해석한다.
십자가의 현장은 ‘강도들 사이에 놓인 하나님의 아들’, ‘가장 더러운 장소에서 가장 깨끗하신 분의 죽음’이라는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이 아이러니 속에서, 죄인이던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입었음을 되새길 수밖에 없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모순된 장면은 오히려 예수님의 절대적 주권과 사랑을 더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십자가 아래 끝까지 남아 있던 여인들의 모습과 연결되어, 진정한 헌신과 용기를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여인들의 순수한 믿음과 희생적 사랑을 교회가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직 사랑만이 두려움을 내쫓을 수 있고, 오직 사랑만이 십자가의 깊은 고통 속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게 만든다.
요한복음 19장의 기록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성경의 예언(시편 22편 등)을 성취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 안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뤄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가 이 본문에서 강조하는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내려오시고, 비우시고, 모든 것을 바치신 길이 참된 승리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소명이라는 점이다. 빌라도의 강압적이고 정치적인 처분도, 로마 군병들의 욕심 가득한 제비뽑기도, 유대 지도자들의 무정한 외침도 결국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구속의 길 앞에서 무력해진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써 세워진 나무 십자가는 그 어떤 정치적 모략과 세속적 욕망보다도 강력한 진리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절대적 헌신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길을 우리도 걸어야 함을 자각한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길이 교회를 살아 있게 만드는 은혜의 원천이라고 선포한다. 여전히 세상은 우리의 주의를 빼앗고, 탐욕과 이기심을 부추기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에게는 주님의 사랑과 겸손, 희생과 헌신의 영이 임하게 된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강도들의 한가운데서 고난당하신 것은, 우리 모두를 강도 같은 죄인의 상태에서 건지시려는 주님의 깊은 사랑이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유효한 복음의 메시지다. 우리는 이 복음을 붙들고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야 하며, 장재형목사는 이 복음을 통해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예수님의 거룩한 희생을 전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2.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2,0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이지만, 지금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도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 사회는 물질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며, 교회조차도 세속화의 물결에 흔들릴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9장 18절부터 이어지는 십자가 장면을 통해, 교회와 성도가 붙들어야 할 핵심 가치를 강조한다. 그는 십자가 사건이 갖는 영적 교훈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희생의 사랑이야말로 구원의 본질이라는 사실, 둘째, 그 사랑이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선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이 강도들과 함께 달렸다”는 모습에서 극적 역설을 체감하게 만든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몰려 사형 언도를 받으셨지만, 실상은 그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시는 대속 사역을 행하시는 장면이다. 이 모순적 상황을 현대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 공동체 역시 세상 속에서 욕을 먹고 조롱받을 때가 많지만, 그럴수록 진정한 복음의 핵심을 보여 줘야 한다는 도전을 얻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세상 한복판에서 ‘십자가 신학’을 드러낼 때, 오히려 세상의 ‘강도 같은 죄인들’이 구원의 문으로 초대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가 종종 ‘십자가 정신’을 망각하고, 물질적 풍요나 대외적 영향력, 권력과 결탁하는 유혹에 빠진다는 점이다. 이는 로마 군병들이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려 도박판을 벌이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도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입으로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많은 이득을 취할까?” “어떻게 하면 나의 소유와 권위를 확장할까?”를 고민할 때가 많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옷 한 벌을 차지하기 위해 제비를 뽑던 군병들의 모습은, 현대 교회 안에서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지적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이 결코 세상적 방식으로 자신의 왕권을 행사하거나 물질적 부를 추구하지 않으셨음을 환기한다. 오히려 주님은 세상의 왕들과 달리,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사역하셨고, 결국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가장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완성하셨다. 이 점에서 교회와 성도들은 ‘십자가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강력한 도전을 받는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부하면서도, 실제 생활 속에서는 세상의 성공 공식과 부귀영화를 따르는 이중적 태도를 취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곧 교회와 성도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다.
이처럼 십자가는 치욕과 수치, 나아가 죽음의 상징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새롭게 만드는 부활 소망의 출발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 없이는 결코 부활이 없고, 자기부정 없이는 결코 새 생명을 누릴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 공동체는, 언제나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으로 풀어 내야 한다. 오직 그럴 때만이 교회가 세상 속에서 참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강도들과 함께 달리시고, 로마 군인들의 능욕을 받으셨으며, 백성들에게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을 당하셨다. 하지만 이 모든 굴욕 속에서도 주님은 신적 권능으로 복수하거나 반격하지 않으셨고, 끝까지 침묵 속에서 용서를 선언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인간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절정이다.
이를 다시 오늘날의 신앙 현실에 적용해 보면, 교회도 얼마나 자주 사소한 문제로 분쟁을 일으키고, 용서하기보다 보복하고 반목하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의 계명을 외면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가 교회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십자가가 장식물로만 남아 있거나, 종교적 상징으로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신앙,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실제적인 변화와 화해, 용서를 일으키는 능력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십자가의 파워이며, 교회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방법이다.
또한 십자가 아래에서 마지막까지 주님을 지켰던 여인들의 모습을 통해, 교회는 ‘결국 사랑이 남는다’는 진리를 배워야 한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주님 곁을 지켰던 이 네 여인, 곧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는, 주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두려움을 넘어선 구체적 사례다. 인간의 합리적 계산으로 보면, 십자가 처형장에 남아 있는 것은 불필요한 위험만 자초하는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그들을 떠나지 못하게 붙들었고, 이는 결국 부활의 새벽에도 가장 먼저 주님을 만나게 되는 축복으로 이어졌다. 교회가 이 사랑의 정신을 놓치지 않을 때, 세상의 조롱과 핍박 가운데서도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견해다.
장재형목사는 “사랑이 두려움을 이긴다”는 원리를 강조하며, 교회가 세속적 유혹을 이기고 복음의 진수를 지키는 길은 십자가의 사랑에 굳게 서는 것뿐이라고 가르친다. 교회의 예배와 활동이 아무리 규모가 크고 화려해도, 그 안에 십자가 정신이 살아 있지 않다면,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세상은 지금도 교회가 가진 막강한 재정이나 건물의 웅장함이 아니라, ‘진짜 사랑’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직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나온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과거의 처절한 죽음 이야기가 아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한, 십자가는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돌아보게 하고, 동시에 용서와 사랑의 길을 걸으라고 초대한다. 예수님이 죄 없이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군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그분을 조롱하고 옷을 빼앗아 가듯이, 오늘날에도 교회와 성도는 부당한 대우나 조롱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세상과 다른 길을 보일 수 있는 기회다. 우리는 로마 군병들처럼 구태여 더 많은 유익을 얻기 위해 소란을 일으키는‘제비뽑기’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묵묵히 따르며 사랑을 나누고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십자가형 제자도’라고 부른다. 즉, 제자도는 왕으로 군림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세상의 죄와 상처에 동참하면서도 남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제자도의 궁극적 모델이다. 여기에는 ‘나를 부정하고 나의 이기심을 내려놓는 고난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지만, 그 고난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다. 이런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길’이며, 교회가 감당해야 할 본분이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와 저술을 통해, 교회가 십자가의 메시지를 어떻게 현대적 맥락에 적용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물질만능과 경쟁 구도가 심화되는 사회에서, 교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행사나 시설 투자에만 집중하기보다, 사회적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원을 할애할 것을 권면한다. 또, 정치 권력에 편승하거나 세상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애쓰는 대신,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성기고, 타인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곧 십자가 정신의 실천적 구현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맞닥뜨린 도전들은 다양하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포스트모던 사조와 다원주의, 가치 상대주의가 범람하는 상황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약해지고 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교회의 참된 영향력은 화려한 구호나 프로그램, 혹은 현실 권력과의 결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순전한 복음을 붙들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오히려 세상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는 역사를 돌아볼 때, 십자가 중심의 영성과 실천을 강조했던 교회들이 결국에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왔던 전례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가 매일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십자가는 곧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고백하는 자리다. 동시에, 그 사랑에 힘입어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 자리다. 현대 교회의 여러 문제들은, 사실상 이 십자가의 영적 본질을 붙들지 못할 때 발생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지적한다. 예배 스타일의 변화나 프로그램 혁신, 조직 개편 이전에, 가장 근본적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십자가 신학이라는 것이다.
십자가 곁에 끝까지 남아 있던 여인들의 행동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교회의 정체성’을 상기시킨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여성 제자들은 당시에 사회적 약자이자, 법적 지위가 보장되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헌신과 용기는 오히려 십자가 사건의 핵심 증인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사회적 약자, 소외된 이들, 목소리를 내기 힘든 이들과 연대하여 그들의 편이 될 때, 십자가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단지 건물 안에서만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눈물 흘리는 이들과 함께 울고, 소외된 이들을 적극적으로 돌보는 열린 공동체’가 될 것을 거듭 역설한다.
십자가 사건이 현대 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교회는 십자가의 정신, 곧 예수님이 보여 주신 자기희생과 사랑의 모델을 따라야 한다. 교회 안에 갈등과 분쟁이 있더라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서로 용서와 화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사회가 교회를 비난하고 조롱한다 해도,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길이 곧 생명의 길임을 믿고 더욱 겸손히 낮아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그 낮아짐이 결국은 세상에 섬김과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될 때, 오히려 많은 영혼들이 복음 앞에 돌아오게 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길이 오늘날에도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방식’이라고 결론짓는다.
따라서 요한복음 19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세속적 욕망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마음을 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상당수는 고난 앞에서 뿔뿔이 흩어졌지만, 십자가 곁에 남아 있던 이들, 특히 여인들은 끝까지 그 사랑을 붙들었다. 마찬가지로 현대 교회가 ‘십자가의 사랑’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면, 세상의 비난과 핍박 속에서도 주님이 예비하신 부활의 영광을 맛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메시지다.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오롯이 담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과 대제사장되심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러나 이 놀라운 구원의 완성은, 로마 군병들과 유대 지도자들의 잔인함과 무정함 한가운데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역설적이다. 이는 교회와 성도가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거룩과 사랑을 실천해야 할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 힌트다.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거나, 부당한 조롱을 당할까 두려워 숨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르며, 강도 같던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를 전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십자가 영성으로 무장된 교회만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선언한다.
십자가는 눈물과 아픔, 심지어 죽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부활과 희망, 구원의 문을 열어 주는 열쇠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것이고, 교회가 교회다워진다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 정신으로 모든 사역과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비하는 데 달렸다. 십자가 앞에 선 우리는 더 이상 군병들처럼 제비뽑기로 사소한 소유를 다투거나, 권세자들처럼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주님이 그 피로 사신 영혼들을 귀히 여기고, 고통 중에도 주님을 등지지 않는 사람들이 된다.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에 따르면, 십자가 사건은 교회와 성도의 ‘영적 출발점’이자 ‘계속적인 귀의점’이다. 출발점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았기 때문이며, 계속적인 귀의점이라는 것은, 날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하면서도 수시로 넘어지는 우리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는 힘이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전히 강도들과 탐욕스러운 군병들로 가득 차 있고, 자칭 왕을 자처하는 이들이 날뛰고 있지만, 예수님이 보여 주신 대속의 사랑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며 죄인들을 불러 구원의 자리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가, 이 사랑을 선포하고 몸소 실천하며, 부활의 소망을 잃지 않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로마 병정들의 손에 빼앗긴 ‘통으로 짠 옷’은, 어떤 면에서 이미 찢겨진 예수님의 몸을 상징한다. 주님의 몸이 찢기고 피 흘리심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사실 앞에서, 교회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움켜쥘 수가 없다. 주님이 모든 것을 주셨다면, 우리 또한 기꺼이 나누고 헌신하며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교회의 영적 성숙은 크게 두 축으로 요약된다고 말한다. 첫째, 예수님의 전적인 희생이 우리 죄를 구속했다는 사실을 믿는 ‘은혜’의 차원이다. 여기서 우리는 더 이상 죄의식과 무력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와 기쁨으로 예배하고 섬길 수 있다. 둘째, 그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게 만드는 ‘제자도’의 차원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결국 자신도 누군가에게 은혜를 흘려보내야 함을 깨닫는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신앙을 단단히 붙들어 주며, 교회가 세상 한복판에서 어떠한 가치로 살아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안내한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 안에 담긴 이 중대한 메시지를 놓치지 않도록, 날마다 묵상하고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할 때, 교회는 그저 종교 조직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고, 실제로 세상을 치유하고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된다. 예수님이 강도들 사이에서 아무런 변명 없이 죽으셨던 그 장면이 보여 주는 충격적인 사랑, 그리고 마지막 남은 옷까지도 빼앗긴 후에야 완성된 구원의 역사야말로, 오늘도 우리를 회복시키고 새롭게 거듭나게 만드는 복음의 근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