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용납하라 – 장재형목사


1. 교회 안의 다양한 관점과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는 사도의 권면

로마서 14장은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른 관점과 견해를 가진 이들이 마주칠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본문이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서로 비판하지 말고 주 안에서 용납하라”는 기조의 메시지를 전한다. 특히 본문(14:1-12)을 통해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하는데, 이는 초대 교회 안에 존재하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사도의 실제적 지혜와 사랑이 깃든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르침은 교회사가 흐르는 내내 반복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며,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장재형(장다윗)목사 또한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삼아,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갈등을 복음의 정신으로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현대 교회가 ‘화합과 일치’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크고 작은 분열을 겪는 상황에서, ‘서로를 비판하지 않고 용납하는 자세’는 여전히 핵심적 과제로 남아 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 두 그룹을 지목한다. 하나는 ‘약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자’이다. 바울은 이 둘을 ‘유대인 출신 신자들’과 ‘이방인 출신 신자들’로 명명하기보다, 그들의 믿음 수준에 따라 ‘약한 자’와 ‘강한 자’로 묘사한다. 약한 자, 즉 믿음이 연약하다고 언급된 자들은 율법이나 음식 규례를 엄격하게 지키는 이들이었다. 반면 강한 자라 불린 사람들은 복음의 자유를 더 폭넓게 누리며 특정한 음식 규례나 날의 구분에 얽매이지 않았다. 이 두 그룹 사이의 갈등은 먹는 문제와 절기를 지키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유대인 출신 신자들은 정결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고기를 피했고, 그런 엄격한 삶의 방식을 가진 이들을 바울은 ‘약한 자’로 보았다. 반면 이방인 출신 신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나 돼지고기 같은 것까지 자유롭게 먹고 마셨다. 바울은 그러한 자유를 누리는 쪽을 ‘강한 자’로 명명했다.

하지만 이 분류에는 바울의 깊은 신학이 내포되어 있다. 바울은 자유를 누리되 타인의 양심이나 믿음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그 자유가 오히려 죄가 될 수 있음을 늘 강조했다. 이는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복음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복음은 ‘자유’라는 놀라운 선물을 준다. 그러나 그 자유는 사랑을 통해 제한되어야 한다.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때론 그 자유를 절제할 수도 있어야 한다. 결국 바울은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기보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가 지향해야 할 복음적 일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14장 1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시작한다. 이는 사실상 교회 안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강한 자’가 취해야 할 태도를 직접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바울은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2절)”라고 하면서, 그 둘이 함께 공존하는 상황을 직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양쪽 다 ‘주를 위하여’ 먹고, ‘주를 위하여’ 먹지 않는다고 설명한다는 점이다(6절). 즉, 특정한 음식 규례나 절기 준수 여부가 궁극적으로 신앙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보수주의 전통은 종종 ‘나만이 진짜 믿음을 지키고 있다’고 여기곤 하고, 자유주의 전통은 ‘나만이 복음 안에서 옳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바울은 양쪽 모두가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이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고백한다면, 서로를 섣불리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믿음의 강함이나 약함이라는 구분은 오직 주님만이 완벽히 아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4절)”라는 구절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모두 주님의 종이니, 종이 종을 심판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장재형목사도 다양한 설교와 강연에서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점을 누차 강조해 왔다. 교회가 세상의 시선으로‘누가 옳은가, 누가 더 신앙이 좋은가’를 재단하는 순간, 이미 복음의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모습이 되기 쉽다. 비판이 아닌 용납, 의심이 아닌 사랑으로 서로를 대할 때에야 비로소 교회 안에 ‘화평과 희락과 의’가 충만하게 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곧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2)”는 교훈은 교회 공동체 내부 갈등 해결의 핵심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기준 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을 ‘주 안에서 행하되’, 그것이 형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권면한다. 특히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음식과 관련한 논의, 즉 우상 제물과 같은 문제에서, 바울은 자신의 자유보다 상대방의 믿음이 훼손될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분쟁과 갈등을 일으키기보다는, 서로 화목을 도모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쪽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교회 현장에 그대로 적용해보면, 예를 들어 오늘날 예배 음악 스타일의 차이, 세례 및 성찬식에 대한 방식의 차이, 특정 절기 준수 여부의 차이 등은 ‘아디아포라(adiaphora)’ 즉,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단정 짓기 어려운 영역에 속할 때가 많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 다양한 갈등이 근본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본질적인 문제인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그것이 영생이나 죄 사함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핵심 교리가 아니라면,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으로 보듬되, 혹시 서로가 ‘의심을 품게’ 되거나 ‘믿음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면, 기꺼이 내 자유를 절제해야 한다. 결국 그토록 강조되는 ‘화평과 덕’이라는 열매는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 누군가를 의심하고 업신여기는 태도는 곧 교회 공동체의 연합을 저해한다. 바울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고백(8절)을 통해, 서로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존재이기에 함부로 판단하거나 경멸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전달한다.

이렇듯 로마서 14장 1-12절에서 펼쳐지는 바울의 가르침, 그리고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라고 하신 엄중한 말씀(마 5:2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마 7:1-2)은 교회 안에서 필수적으로 지켜져야 할 기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바로 이 교회 내의 ‘정죄와 비판 문화’가 탈피되지 않으면 어떠한 갱신이나 부흥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는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용납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화목’을 이뤄내야 한다고 설파한다. 실제로 사랑과 화목이 깨어진 현장이 곧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현장임을 그는 자주 강조한다. 결국 교회가 밖에서 오는 박해나 억압 때문에 쓰러지기보다, 내부에서 서로를 비판하고 분열할 때 더 쉽게 무너진다는 점이 바울과 장재형목사의 메시지에서 일맥상통한다.

로마서 14장 말씀은 역설적으로 교회가 얼마나 다양한 전통과 문화를 포용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고, 이방인들은 자기네 문화에 맞는 절기를 중히 여기기도 하지만, 바울은 어느 한쪽 편도 들지 않고 양쪽을 다 아우르는 시각을 제시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그렇다(14:6 참조)”는 식으로, 중요한 것은 ‘동기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설명한다. 교회는 이러한 다양성을 넓은 마음으로 수용하면서도, 여전히 하나의 복음을 붙들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형제끼리의 비판이나 업신여김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함께 가는 과정이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2. 형제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한 신앙적 실천과 사랑의 제한

바울이 로마서 14장 13-23절에서 두 번째로 강조하는 바는 ‘형제로 하여금 거리끼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1-12절에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용납하라고 말했는데, 이제는 더 구체적으로, 내가 행하는 자유로운 행동이 혹 다른 이의 신앙을 넘어뜨리지는 않는지 살피라는 실천적 권면이 이어진다. 바울은 13절에서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한다. 이는 식생활, 절기 준수 등에서 ‘내가 비록 허용된 자유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된다면, 그것을 절제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때 바울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아디아포라(adiaphora)”다. 이것은 어떤 행위가 ‘본질적인 선이나 악이 되지 않는’, 다시 말해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가치 중립적 영역을 가리킨다. 교회 역사 속에서 성도들은 수도 없이 많은 문제들—예배의 구체적 형식, 음악 스타일, 의복 규정, 문화적 습관—에 대해서 논쟁해 왔다. 어떤 전통은 엄격함을 강조했고, 또 다른 전통은 자유를 강조했지만, 이 둘 모두가 복음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그 방법론에서 차이를 보인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바울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다(14절)”라고 말한다. 즉 본질적으로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죄가 되진 않으나, 그것을 죄라고 인식하는 이에게 강요하듯 먹게 하거나, 혹은 그를 비난해 버린다면, 그것이 곧 죄가 되고 말 수 있다는 논리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 대해 설교할 때, ‘사랑은 자유를 제한한다’는 주제를 즐겨 사용한다. 어떤 이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것은, 또 다른 이들에게는 신앙적 거리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그것은 전혀 문제 되지 않는 것이니까 그냥 같이 누리자’고 강권하기보다, ‘그 사람에게 불편함이 있다면 기꺼이 내 자유를 제한해서라도 그를 배려하겠다’고 결단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도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결코 고기를 먹지 않겠다(13절)”고 선언했다. 이는 극단적인 예시 같지만, 실제로 바울이 깨달은 복음적 자율성은 ‘나의 자유를 가장 우선시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형제를 살리는 방식’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어떤 권리와 자유도 형제의 믿음을 해칠 수 있다면 기꺼이 내려놓겠다는 것이다.

로마서 14장 15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는 말은 이 맥락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자기의 기호나 입장을 끝까지 고집하여 형제를 근심하게 만들고 넘어뜨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생명까지 주신 형제를 멸망시키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경고다.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은 곧 그리스도의 희생을 헛되게 만드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공동체 안에서 강한 자들은 오히려 약한 자들을 더 배려해야 한다. 강하다는 말은 단순히 신앙적 ‘수준’을 의미하기보다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폭’이 크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 자유를 오남용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고백할 때, “아니, 돼지고기 먹는 건 죄가 아니니까 먹어!”라고 억지로 권하는 것이야말로 바울이 말한 ‘넘어뜨림’이나 ‘거리끼게 함’에 해당할 수 있다. 사랑의 출발점이란 ‘상대가 어떻게 느끼는가’를 먼저 헤아리고 그를 세워주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교회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교회 내에는 다양한 취향과 성격, 그리고 신앙 배경이 공존한다. 누군가는 어떤 예배 형식이나 문화적 표현을 마음껏 수용하고 즐긴다. 반면 누군가는 그것을 대단히 거부감 있는 것으로 느낀다. 모두가 ‘주를 위하여’라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럴 때 “교회 안에서의 질서와 화합을 위해 기꺼이 내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로마서 14장 19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고 말한다. 즉 성도들은 논쟁을 일으키고 분쟁을 조장하는 것보다, 화평의 일을 찾고 서로 세워주는 길을 모색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한 몸이 되어 섬기는 것이며, ‘먹고 마시는 문제’에 매몰되어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절)”는 말은 이 논쟁의 핵심을 꿰뚫는다. 형제들에게 근심과 시험거리를 주어서는 안 되며, 평화를 깨트려서도 안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에 대해 설교할 때 종종“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진정한 ‘샬롬’의 회복”이라고 언급한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의, 평강, 그리고 기쁨이 충만한 상태이니, 만약 교회 안에서 음식이나 절기, 제도의 문제로 인해 긴장과 갈등, 원망과 비판이 난무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서 많이 멀어진 상태다. 따라서 로마서 14장에서 강조되는 바는,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문제라도 다른 형제의 믿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면, 그 문제를 신중하고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과 직결되는 필수 교리가 아닌 한, 사랑이 모든 지식을 초월한다. 바울의 표현대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요”라는 진리를 명심해야 한다.

특히 14장 20-21절에서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바울은 기독교 자유가 그 자체로는 선하지만, 결국 더 큰 선인 ‘형제의 구원과 기쁨’을 위해 기꺼이 제한될 수 있어야 함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마지막 23절에서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결론 맺는다. 바울은 무엇이든지 ‘양심의 거리낌 없이 믿음으로 행하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관건은 자기양심뿐 아니라 타인의 양심까지 고려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아무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해도, 그로 인해 형제가 상처받거나 시험 드는 상황이라면, 바울은 멈춰야 한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를 세우는 데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신은 교회공동체가 가진 고유한 윤리적 실천이기도 하다. 세상은 “왜 내가 배려해야 하는가, 각자 알아서 할 일이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성도가 ‘나’만이 아니라 서로를 돌보는 책임을 진다”고 선언한다. 이를 장재형목사는 여러 강연에서 ‘십자가 공동체 의식’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님이 자기 몸을 내어주신 그 사랑을 기억하는 교회라면, 서로에게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섬기고 돌보는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방 문화와 구약 율법 사이에서 갈등이 컸던 초대 교회의 상황은, 오늘날 다원화 시대 교회가 지녀야 할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교회 안에는 신앙의 연륜, 문화적 배경, 교파적 전통 등이 다른 이들이 뒤섞여 있으나, 복음의 본질을 추구하며 서로 용납하고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한다. 그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을 통한 자유의 제한’이란 것이다.

3. 공동체적 섬김과 넓은 마음으로 이방인을 용납하라는 마지막 권면

로마서 15장 1-13절까지 이어지는 바울의 권면은 사실상 14장의 주제를 더욱 확장시킨 것이다. 바울은 15장 1절에서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말한다. 이는 형제의 짐을 서로 지라는 권면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구체적인 섬김으로 드러나는지 보여주는 구절이다. 한쪽에서는 특정한 규례나 문화를 지키지 않는다고 의심하고, 다른 쪽에서는 율법적이라고 비판하는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바울은 ‘서로 돕고 세워줘라’고 촉구한다. 장재형목사 또한 약한 자를 배려하고 섬기는 것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큰 특징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가 ‘약한 자’를 소외시키거나 정죄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무색해진다. 예수님조차 자신을 기쁘게 하기보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니, 이제 우리 역시 다른 이를 세워주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신학적 기초다.

15장 4절 이하에서는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라고 말하면서, 구약 성경을 통해서도 인내와 위로의 소망을 얻게 된다고 밝힌다. 그 후 5-6절에서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기원한다. 이는 갈등과 분열로 인해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교회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바울이 간절히 바라는 대목이다. 초대 교회나 현대 교회나, 갈등의 양상과 규모는 다르지만, 서로를 품고 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찬양 드리고자 하는 열망은 동일하다. 바울의 기도는 시대를 초월해 교회의 비전이 된다.

결국 15장 7절부터 시작되는 “넓은 마음으로 이방인을 용납하라”는 부분은 이 전체 가르침의 결론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절)”라고 명시한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갈등은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 교회 최대의 이슈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의 전통을 물려받은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이방인들은 그러한 율법적 전통을 ‘불필요한 제약’이라 여기며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울이 실제로 체험한 갈등이었으며, 초대 교회의 곳곳에서 발생한 뜨거운 논쟁이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등 여러 서신을 통해 끊임없이 “이제는 차별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이다”라는 선언을 이어나갔다. 로마서에서도 동일하게, 이방인을 부정하거나 유대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넓은 마음을 갖고 받아들이라고 요청한다.

여기에는 구약의 예언과 그 성취에 대한 바울의 신학이 뒷받침된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땅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메시지였고,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확장되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구원을 누리는 공동체를 계획하셨고, 그 점을 바울은 다양한 구약 인용(시편, 신명기, 이사야 등)을 통해 설파한다(15:9-12). 이렇듯 복음은 단지 특정 민족이나 문화권만 위한 것이 아니며, 곧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도 어떤 민족적, 문화적, 신앙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든, 복음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연대해야 한다. 바울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믿는 자에게 평강과 기쁨을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한다(13절)”며, 궁극적으로 이 복음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교회 전체와 더 나아가 세상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시대 교회가 처한 현실을 지적하면서, 다양한 인종과 언어, 문화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장(場)이야말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교회가 특정 문화, 특정 민족, 특정 계층의 잣대만을 절대화해버리면, 결국 복음이 가진 ‘하나 됨’과 ‘포용’의 능력을 제한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내가 혹은 우리 공동체가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바울이 로마서 15장 2절에서 말한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게 하라”는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한다. 때로 이방 문화를 가진 성도들이 들어올 때, 기존 교인들은 낯선 언어나 습관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반대로 이방 문화권 출신들은, 오래된 교회의 전통이나 관습을 답답하게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교회는 그 둘을 통합해야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15장의 메시지는 바울 서신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복음의 만유성’이라는 관점에서, 복음은 이 세계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이다. 그 초청 안에서 이제까지 분리되었던 나와 너, 유대인과 이방인, 강한 자와 약한 자, 보수와 진보 등이 하나로 연합하게 된다. 이 대연합은 그저 외형적인 모습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서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형제자매로 존중하며, 한 몸을 이루는 본질적 통합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갈등의 자리를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해소해 나갈 때, 교회는 참된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요한복음 17장)를 자주 인용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에“아버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기도 그대로 교회 안에서 ‘분쟁’과 ‘분열’이 아니라, ‘화합’과 ‘용납’이 나타난다면, 세상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반면 교회가 그 본질을 놓치고, 개인주의와 비판 정신에 사로잡혀 갈등을 지속한다면, 세상은 교회를 향해 “스스로도 하나 되지 못하면서 무슨 복음을 전하느냐”고 조롱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1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경고했다. 교회 밖에서 교회를 비방할 빌미를 우리 스스로 제공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2000년 전에도 시급한 경고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급한 경고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로마서 14장과 15장에 걸쳐 펼쳐놓은 가르침은 오늘의 교회에도 중요한 지침을 제시한다. 첫째, 교회 안에 다양한 신앙적 배경과 문화가 존재할 때 “서로 비판하지 말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도 말고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의심하지도 말라”고 권면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유’를 만끽하되, 그것이 누군가의 믿음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기꺼이 절제할 줄 아는 사랑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셋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본받아 서로의 약점을 짐 지는 방식으로 섬겨야 하며, 나아가 이방인도 넓은 마음으로 용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시대를 초월한 복음의 기초라고 보며, 지속적으로 교회가 갱신해나가야 할 화두로 제시한다.

이러한 가르침에 근거해보면, 로마서 14-15장이 말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마치 넓은 초원에서 다양한 동물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과도 같다. 초원에서는 사자가 맹수이지만, 병들어서 자기 내부가 무너지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진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외부의 박해나 공격 때문에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과 비판이 쌓여 자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나와 다른 이들’, 혹은 ‘나보다 연약하다고 보이는 이들’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지켜주고 세워주는 쪽을 선택할 때 교회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안에 바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자리 잡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를 통해 세상에 복음을 확장시키신다.

장재형목사가 설교 중 자주 들려주는 예화 중 하나는, 가정에서 아이들이 다툴 때 부모가 중재하는 모습이다. 부모는 어느 한쪽 편만 드는 것이 아니라, 둘 다 귀중한 자녀이기에 서로 화해하고 이해하기를 바란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약한 자와 강한 자 모두를 향해 “너희는 내 자녀이니 서로 비난하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존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음식 규례와 절기 준수를 넘어, 오늘날에도 숱하게 발생하는 교단 간, 교파 간, 문화 간, 세대 간 갈등을 생각하면, 이 원리는 결코 옛날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용납하라”는 바울의 명령은 더 절실히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15장 13절에서 바울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믿는 자에게 평강과 기쁨을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넘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축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지 갈등을 회피하거나 무조건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갈등을 복음의 능력으로 녹여 내어 최종적으로 기쁨과 평화를 풍성히 누리게 되는 과정이다. 교회가 이 기쁨과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 안에 혹여 뿌리박힌 ‘비판과 의심, 경멸’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또 장재형목사가 줄곧 강조해 온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라’는 요청을 따를 때, 교회는 말 그대로 다양한 전통과 문화를 아우르며 통일성(unity in diversity)을 이루게 된다. 이런 교회의 모습을 보고 세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무너진 자들이 다시 일어나 복음 앞에 무릎 꿇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결국 로마서 14-15장은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성도는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전적이면서도 영원히 유효한 지침이다. 서로 다른 두 그룹—약한 자와 강한 자—가 존재할 때, 그 차이를 넘어서서 함께 살아갈 길을 보여준다. 바울은 이 과정에서 어떠한 이론적 교리보다 ‘복음적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 우리가 비판과 경멸 대신 용납과 사랑을 선택할 때, 교회 공동체 안에 샬롬이 임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화목을 실제로 살아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편만하게 전파된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급선무는 바로 이 ‘서로 용납함’이자 ‘화목’이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부분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자, 모든 사역의 출발점이며 결론임을 여러 자리에서 강조해 왔다.

따라서 “서로 비판하지 말고 주 안에서 용납하라”는 로마서 14장의 대원칙과, “형제를 거리끼게 하지 말라”는 14장 후반부의 실천적 지침, 그리고 15장에서 이어지는 ‘약한 자를 섬기고 이방인을 넓은 마음으로 받으라’는 최종 권면은, 교회 공동체라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다. 신앙생활에서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복음의 정신은 결코 서로를 깎아내리는 경쟁 구도를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세우고 섬기는 관계망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신약 성경 곳곳에서 확인되는 교회 본래의 모습이다. 이 가르침을 기억하며, 현대 교회가 겪는 모든 다양성과 갈등이 ‘주 안에서’ 아름답게 녹아들어 하나 됨을 이루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을 우리 시대에 맞게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그 실천의 열매를 통해, 믿지 않는 자들도 교회를 보며 “참으로 하나님이 저들 가운데 계시는구나” 하고 고백하게 되길 소망한다. 교회가 각 개인의 자아실현만을 좇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여 서로를 살리는 길을 택한다면, 세상은 교회를 통해 화해와 치유의 빛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2천 년 전 바울의 상황이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상황이나, 복음이 요청하는 기본 정신은 동일하다. 형제를 비판하는 대신 용납하고, 나의 자유를 누리되 타인을 넘어뜨리지 않도록 사랑으로 절제하며, 더 나아가 약한 자를 돌보고 외부인(이방인)을 환영하는 태도는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의 핵심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다 서게 되리라(롬 14:10)”는 경고를 기억하는 성도의 삶이다. 진정으로 교회가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보게 되는 길은, 비판과 분열을 선택할 때가 아니라, 서로 용납하고 함께 복음적 기쁨을 누릴 때 열린다. 이 메시지는 장재형목사의 여러 설교와 가르침 속에서도 반복되는 핵심 키워드이며, 교회가 회복해야 할 참된 복음의 길임을 우리는 다시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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