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성전을 헐라”는 예수의 급진적 선언을 요한복음의 핵심 축으로 붙들고, 오늘의 교회가 무엇을 허물고 무엇 위에 다시 세워야 하는지 해설한다.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예언으로만 이해하지만, 그는 이를 타락한 종교 구조와 인간 중심 신앙을 뿌리째 흔드는 영적 개혁의 외침으로 본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는 성전 뜰의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내쫓으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선포했고, 이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2:13–21). 복음서는 이때 그분이 가리킨 성전이 손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그의 몸”이라고 분명히 밝힌다(요 2:21).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예수의 말씀 전체가 파괴가 아니라 대체, 곧 옛 제도와 의식을 십자가와 부활의 현실로 완성하시는 구속사적 선포였음을 강조한다. 헬라어 원문에서 “헐라(λύσατε)”가 2인칭 복수 명령형이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이는 예수가 스스로 성전을 무너뜨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체제가 결국 메시아를 십자가에 내어주어 그분의 몸을 찢게 될 것을 역설적 명령으로 드러낸 표현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결과적으로 “너희가 헐라, 나는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는 메시지는 체제의 폭력과 하나님의 부활 권능 사이의 대조를 통해 새 성전의 시작을 선포한다.
이 장면의 역사적 배경은 종교 권력과 경제 이권의 결탁이다. 성전세와 제물 판매, 환전 사업이 얽힌 성전 경제는 안나스–가야바 가문을 축으로 거대한 이익을 만들어 냈고, 예배의 중심 공간을 장터로 전락시켰다. 성전 정화 사건은 우발적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이권의 도구로 삼은 체제에 대한 의도적이고 상징적인 심판이었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성전을 헐라”가 건축물의 철거가 아니라 거짓 종교 구조의 해체를 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예수의 채찍은 상징이었다. 그 채찍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것’을 파는 모든 질서를 겨냥했고, 오늘의 교회 현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규모와 숫자, 명성과 영향력, 프로젝트와 건축이 복음의 핵심을 밀어낼 때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성전 장터가 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8장에서는 갈등이 정점에 이른다. 예수는 체포되어 먼저 안나스에게 끌려가고, 이어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신문을 받는다(요 18:12–24). 성전 권력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협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제거하려 했고, 성전정화 사건은 그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방아쇠가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한다. 체제는 늘 성전을 지키려 하지만, 사실은 성전이 지켜야 할 하나님을 가릴 수 있다. 예수는 바로 그 가림막을 걷어 내셨고, 그 결과 십자가 형을 받으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죽음이 사흘 만에 새 성전을 일으키는 길을 열었다.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던 담이 무너졌다는 선포다(막 15:38; 히 10:19–20). 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가던 시대는 끝났고, 누구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사실은 예배의 중심이 장소에서 인격(그리스도)으로, 제도에서 복음으로 이동했음을 알린다.
초대교회는 이 전환을 생명으로 증언했다. 스데반은 “이 예수가 이곳을 헐고 모세가 전한 규례를 고치려 한다”는 고발을 받고 순교했는데(행 6:13–14), 그의 설교는 하나님이 특정 공간에 갇히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역사의 서사로 증언한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행 7:48–50). 장재형목사는 스데반의 피가 교회의 방향을 성전 중심 신앙에서 그리스도 중심 신앙으로 돌려놓았다고 본다.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고(고전 3:16), 에베소서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 한 성령으로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이라 설명했다(엡 2:21–22). 베드로는 우리를 ‘살아 있는 돌’이라 부르며, 예수를 머릿돌로 한 집이 되어 간다고 증언한다(벧전 2:4–6). 이러한 교회론의 흐름은 요한복음 2장의 새 성전 선언과 정확히 맞물린다. Temple cleansing과 새 성전은 서로 대립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복음 드라마다. 정화로 헐고, 부활로 세운다.
이 메시지는 추상적 구호가 아니다. 오늘의 교회 현실은 ‘작은 성전’들의 유혹으로 가득하다. 브랜드 중심의 사역, 결과주의적 통계, 명성과 영향력의 우상화, 돈과 권력이 신앙을 밀어내는 문화가 성전 마당을 다시 장터로 바꾸어 놓는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증상을 정확히 짚으면서도 정죄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회개와 갱신의 실제적 길을 제시한다. 예배는 복음 중심으로 재배치되어야 하고, 강단은 설득의 기술보다 말씀의 권위로 세워져야 하며, 재정은 투명·검소의 미덕 위에 놓여야 한다. 교회는 연 1회 결산 공개, 선교·구제 비중 명시, 리더십의 섬김 지표(방문·상담·양육 시간)를 공개함으로써 돈과 권력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 광고와 건축 홍보가 예배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도록 하고, 회개와 성찬, 나눔과 선교 안내가 공동체의 우선순위를 증거하도록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교인은 동원되는 소비자가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 봉사하는 제사장적 백성이고, 목회자는 관리자가 아니라 발을 씻기는 목자다. 이렇게 체질이 바뀌면 교회는 더디게 자라지만 깊게 뿌리내린다. 세상의 관심은 일시적이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성전은 영원하다.
디지털 시대의 도전 역시 예외가 아니다. 무한한 정보의 지평에서 우리는 성전의 외형을 복제하기 쉬우나 임재의 깊이는 잃기 쉽다. 온라인 예배와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실제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낳는지 분별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성전을 헐라”는 원리는 이 영역에도 적용된다. 포맷과 플랫폼은 수단일 뿐이며, 어떤 수단도 복음의 실체를 대체할 수 없다. 온라인에서는 더욱 투명해야 하고, 더 관계 중심적이어야 하며, 오프라인의 섬김과 선교로 반드시 연결되어야 한다. 신앙의 진정성은 화면에서가 아니라 실제 삶의 열매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참된 부흥은 조회수의 급등이 아니라 회개와 화해, 나눔과 선교의 확장으로 측정되어야 한다. 새 성전은 클릭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눈물과 기도와 사랑의 헌신으로 지어져 간다. 이 고전적 진리는 디지털 시대일수록 더 빛난다.
이 여정 가운데서 장재형목사의 해석은 두 가지 축을 붙든다. 하나는 본문에 대한 엄밀한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현장에 대한 구체적 적용이다. 본문 해석의 축에서는 요한복음 2:19–21을 중심으로 요한복음 18장의 체포·신문 장면(요 18:12–24), 사도행전의 스데반 증언(행 6:13–14; 7:48–50), 바울의 성전론(고전 3:16; 엡 2:21–22), 히브리서의 휘장 신학(히 10:19–20)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새 성전의 의미를 명료하게 한다. 적용의 축에서는 재정 투명성, 섬김 리더십, 예배의 복음 우선, ‘작은 자’에게 우선권을 주는 선교·구제, 평신도의 제사장성 회복 같은 구체적 변화를 촉구한다. 이 두 축이 맞물릴 때, “성전을 헐라”는 말씀이 교리나 수사로 남지 않고 교회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복음의 동사로 자리 잡는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작동한다. 우리는 누구나 내면에 자기중심성과 물질주의, 외식적 경건과 자기 의로 지은 ‘작은 성전’을 가지고 산다. 그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자아를 예배하게 만든다. 그래서 예수의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도 현재형이다. 내 안의 작은 성전을 헐라. 헐어야 세울 수 있다. 헐어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 새 성전을 올릴 수 있다. 이 작업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는다. 매일의 회개, 매주의 성찬, 말씀 앞에서의 순종, 성령의 인도에 대한 민감함이라는 반복을 통해 내면의 구조가 바뀐다. 정죄가 아니라 은혜가 동력이다. 실패를 숨기지 않고 실패의 자리에서 복음의 능력을 더 선명히 보는 공동체에서 사람은 새로워진다. 성도는 상처를 자랑하지 않고 상처를 통해 흐르는 하나님의 위로를 나눈다. 논쟁으로 이기려 하기보다 이웃의 고통을 끌어안고 함께 우는 자리에서 교회는 새 성전의 빛을 드러낸다. 낮아짐과 섬김의 자리에서만 부활의 권능이 체험되기 때문이다.
결국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파괴의 미학이 아니라 창조의 명령이다. 거짓을 헐어 참을 세우라는 요청, 빈 껍데기를 헐어 생명을 세우라는 초대다. 헐어야 드러난다. 무엇이 중심인지, 누구의 영광인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이 질문 앞에서 정직해질 때, 성전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가 환히 드러난다. 장재형목사(장재형 목사)는 이 길을 오늘의 언어로 해석하고 현장에서 검증하려는 목자다. 그의 메시지는 교회를 향한 거룩한 불편함과 성도를 향한 따뜻한 위로를 함께 담는다. 채찍을 드신 예수와 십자가를 지신 예수, 성전을 헐라 하신 예수와 사흘 만에 다시 세우신 예수를 동시에 보여 준다. 그래서 듣는 이는 자기 안의 위선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게 된다. 무너뜨림과 세움이 교차하는 이 복음의 리듬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려 온 갱신의 길이다. 교회가 다시 건물이 아니라 몸, 제도가 아니라 생명, 성공이 아니라 거룩, 소유가 아니라 사랑으로 불릴 때 세상의 빛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서 각자는 자신에게 명령해야 한다. 내 안의 작은 성전을 헐라. 그리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세우라. 헐어야만, 사흘 만에 다시 세우시는 그분의 권능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에서 현실이 된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눈에 보이는 성전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성전이 일어난다는 것을. 그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말씀과 성령의 호흡으로, 사랑과 거룩의 열매로 지어져 간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