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로마서 강해 2장 – 희생을 악용하는 것에 대해


장재형 목사(장다윗 목사)의 로마서 강해집 로마서 2장을 읽고 난 후 남긴 묵상이다.
장재형 목사 사순절 묵상
2007년 5월,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기독교의 용서의 메시지를 다룬 내용이다.

​로마서 강해 묵상을 하는데 이 영화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던져준다.

“밀양은 경상남도에 위치한 도시의 이름이다. 한 여인이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새롭게 살아보려고 밀양이라는 도시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영화가 시작이 됩니다. 남편이 살았을 때 너무 외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외롭고 힘들게 살다가 그 남편이 죽고 새로운 도시로 가서 새롭게 살아보자는 마음입니다. 미용실을 하면서 남편도 없이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사니까, 동네 사람들이 무시를 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땅을 살 것처럼 부동산을 보러 다닙니다. 돈이 많은 척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 많다는 소문이 나면서 아들이 유괴가 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결국 그 아들은 시신으로 발견이 됩니다. 이 여인이 더 이상 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폐인같이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살다가 교회 사람들에게 전도를 받아서 성경 공부도 하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원수를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원수를 용서해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자가 감옥에 있었거든요. 그렇게 기도하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을 정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생겨서 직접 그 사람을 만나러 가기로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 사람을 직접 만나서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정말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바로 용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이 원수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여인이 진짜 힘겹게 용서했다는 말을 꺼내려고 합니다.그 원수를 만나려고 기다리는데, 그 고통과 떨림이 보는 사람에게도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 자가 눈 앞에 딱 나타났는데, 환하게 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 표정부터가 정말 충격적입니다. 나는 그 웃음을 잃어버린 지가 정말 오래된 것 같은데, 이 사람은 너무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용서하겠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 범인은 내가 감옥에 와서 예수 믿고 모든 죄를 용서 받았으며 너무 기쁘게 잘 지낸다는 말을 합니다.

이 여인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이 충격을 받습니다. 내가 용서한 적이 없는데, 이 범인은 이미 다 용서를 받아서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라는 단어가 갑자기 이 여인에게 큰 분노로 다가옵니다. 자기가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그토록 받아들이려고 했던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그 용서가 갑자기 잔인하고 너무 끔찍한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그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던 이 여인은 예수를 떠나고, 목사님의 설교 메세지를 향해 그 분노를 드러냅니다. 용서는 성경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창세기는 요셉의 용서로 끝이 납니다. 용서는 사랑의 극치입니다. 이 사랑과 용서라는 것을 흔히들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용서가 너무 분노를 일으키는 말이 될 때가 많습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처럼요. 기독교의 용서의 메세지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용서의 메세지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어떻게 전해야 하는 것일까?

이 범인을 우리가 주목해 봅시다. 이 범인은 지금 자기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받고 깨끗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거듭나서 의인이 된다는 말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메세지입니다. 교회가면 늘 듣고 배우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 밖에는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하는 것이 외식하는 신앙, 표면적인 신앙입니다. 신앙인의 모양은 있으나, 결코 그 이면은 불경건과 교만으로 가득한 모습입니다. 이런 외식하는 신앙인들 때문에 기독교가 욕을 먹고 예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알았다고 하고. 그 용서와 자비와 무조건적인 사랑을 알았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큰 죄를 지어 놓고 이 죄에 대한 진실된 회개도 없이 그 무조건적인 은총을 가져다가 자신의 죄를 씻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악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자기의 필요에 따라 함부로 악이용하는 거에요.

감옥에서 이 원수가 나타나, 참으로 가증스러운 표정으로 나는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할 때 이 여인은 무너집니다. 자신이 용서한다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는데, 그 범인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다 용서해주셨다’고 말할 때, 예수님의 용서가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천박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결코 값이 없어 값없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값을 매길 수 없어서 값없이 받는 것이지요. 저라면 그에게 그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당신이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당신이 함부로 그렇게 악이용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사랑을 함부로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이 범인의 말이 너무나 가증스럽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결코 자비와 용서의 세계가 열려질 수 없습니다. 주의 보혈과 그 용서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오직 자신의 죄책을 덜고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 데 악용하는 그 간교함이 그것이 악한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그의 로마서 강해집을 통해서 ‘남을 판단하는 죄’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용하고 멸시하는 죄’ 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 ‘밀양’에서 그 범인이 진정한 복음을 깨달았다면, 그 여인을 만났을 때, 고개를 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한없이 낮아져 자기의 참혹한 죄를 고백하고 끝도 없이 울었을 것입니다. 이런 죄인을 용서하지 말라며 이 여인을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눈물로, 눈물로 밖에는 그 죄스러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신앙인을 책망하신 부분입니다.

마23: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외식하는 신앙의 핵심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자기가 우월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자신이 너무 초라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자신 안에 있는 그 교만은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얼마나 상석에 앉느냐가 중요하고 사람들에게 얼마나 문안을 받느냐가 중요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며 그들에게 소경이라고 하십니다. 표면을 바라보는 눈은 있지만, 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합니다. 겉으로만 거룩하게 보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며, 정작 중요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한 영화의 이야기로 시작된 이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로마서 2장에 나타난 믿는다 하는 자들 안에 있는 불경건에 관하여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외식하는 신앙, 표면적인 신앙의 위험성을 알고,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덧입어 가야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자들을 멸시하는 자들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들을 책망하고 가르치시는 장면이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강해집을 통해 로마서 2장을 ‘남을 판단하는 죄’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용하고 멸시하는 죄’로 요약한다. 로마서 2장은 유대인의 죄를 말하는 부분인데, 로마서가 가르쳐주는 그 죄의 핵심은 이렇게 두 가지이다. 그것을 한 마디로 하면 ‘교만’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이다. 한 없는 희생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진실된 사랑이란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을까. 그런 사랑이 폭포수처럼 내리는 그 에덴에서 그 사랑을 믿지 못했던 아담의 불신이란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지…이 교만과 무지가 죄의 뿌리이다. 하나님께서 꿈꾸셨던 그 온전한 세계와 그 안에서 그 자녀들이 누릴 기쁨과 무한한 영광의 이야기들, 창조 이전부터 있었던 그 아름다운 구상과 계획들을 다 깨어버렸던 그 ‘불신’과 ‘교만’과 ‘무지’는 결국 인류를 사탄의 거짓말을 좇아 참혹하고 비참한 지경까지 인도해낸다.

이렇게 시작된 교만의 죄는 누가복음 18장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자를 멸시하는 모습’으로, 로마서 2장에는 ‘남을 판단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나를 빛내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타락한 인간은 끊임없이 나의 우월성을 빛내 줄 무언가를 찾는다. 그것이 설사 하나님의 은총이라 할지라도…신앙의 껍데기를 썼지만, 사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멸시하고 이용하는 죄악의 삶일 뿐이다. 그리고 남보다 높기 위해서는 남을 깎아내리는 방법이 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그 뒤에는 내가 더욱 의롭고 내가 더욱 뛰어나며 나만이 그들의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고, 나만이 그들을 제대로 가르쳐줄 수 있으며, 나만이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할 수 있다는 교만이 깔려 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셨다. 바리새인은 자기는 매우 의롭고 다른 죄인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그렇게 기도한다. 다른 사람은 멸시하고 자신의 의로운 행위들을 자랑한다. 소경이 눈을 뜬다면, 그래서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고개를 들 수도 없다. 나의 죄가 너무도 크고, 그것이 참으로 짙고, 그 죄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차마 성전 앞에 나가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내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주님께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한다. 주의 은혜를 간절히 구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런 믿음의 이야기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가나안 여인이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그를 개와 같이 취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옳소이다 주님.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라고 그렇게 주의 은혜를 강청한다. 그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그 사랑을 믿지 못했던 아담, 주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토록 신뢰와 사랑을 받았음에도 그 사랑을 몰랐던 유다, 하나님의 선택과 은총의 자리에서도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기에 바빴던 바리새인…그들 안의 불신과 교만이 심판이 되는 순간이다. 이 여인은 사랑받을 수 없는 자리에서도 자기를 낮추고 그 사랑을 구했다.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세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하며 무시한다. 그러나 사실 사람은 모두가 같은 죄인이다. 죄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나보다 크거나 작다고 그렇게 자신과 남을 비교할 수도 있겠으나, 그 비교는 별 의미가 없다. 어차피 결국 모두가 사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려다보실 때, 누구의 죄가 더 크고 누구의 죄가 더 작을까? 그런 비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바리새인이 선행을 한 것은 사실이고, 그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을 선한 것으로 여기며 자랑한다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 보다 앞서 우리의 말할 수 없이 큰 죄악과 그것을 용서해주신 크신 주의 은혜 앞에서, 나의 선행이란 것은 정말 작은 점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딸이 어느 날 노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자기가 명절에 받았던 용돈들을 엄마에게 주었는데, 그 금액을 적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엄마가 자기한테 갚아야 할 것들이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맞는 말이다. 분명 자기가 받은 용돈이고 그건 자기 돈인데, 엄마한테 주었으니 엄마는 자기한테 갚을 것이 있는 빚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엄마가 너한테 받을 것은 얼마인지 한번 계산을 해볼까?’ 어린 아이와 같이 작은 부분만 보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의 선행을 따지기 전에 내 안에 얼마나 큰 죄가 있는가…그리고 그것을 덮어주신 주의 은혜는 얼마나 큰 것인가. 과연 내가 나를 높일 수 있는가. 그저 하늘과 같고 태산과 같은 주의 은혜 앞에 우리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만의 계산 속에 빠질 때, 우리는 실수를 하게 된다.

이 교만의 죄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교만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허물고 파괴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을 통해 인간의 죄를 파헤친다. 그 죄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구원을 말할 수 없다. 결국 신앙은 죄와의 싸움이다. 문제는 수 많은 잎사귀 같은 죄만 보는 데서 그치면 안된다. 그 뿌리를 봐야 한다. 뿌리를 제거해야 다시는 잎사귀가 나지 않는다. 진리의 강렬한 빛을 쪼인 한 사도의 죄에 대한 가르침…이 로마서가 오늘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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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 멘토링 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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