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장재형(장다윗)목사의 로마서 7장 전반에 대한 설교를 정리한 것이다. 로마서 7장을 연구하고 묵상하며, 성도들의 실제적인 신앙 여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율법과 복음’, ‘죄와 은혜’, ‘내적 갈등과 승리’를 심도 있게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1) 율법과 우리의 새로운 관계
로마서 7장은 바울 사도가 율법에 대해 아주 독특한 혼인의 비유를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바울은 먼저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매여 있지만, 남편이 죽으면 자유롭게 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이렇게 결혼과 사망의 예시를 들어 “율법의 지배와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결합”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사람은 율법이 살아 있는 동안,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그 율법 아래에 묶여 있는 동안 그 법의 효력과 통제 아래에 있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믿는 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선언될 때, 이전에 율법이 갖고 있던 지배는 효력이 사라지고 대신 새로운 관계가 성립한다는 논리이다.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남편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죽었다”고 말함으로써, 율법이 없어졌다거나 사라졌다고 하지 않는다. 율법 자체가 무효화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므로 ‘나’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내가 죽었으니, 이전의 관계가 더는 효력이 없게 되었다”라는 관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복음의 메시지와 직결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공로와 대속(代贖)을 이루셨을 때, 믿는 자 또한 함께 죽었다고 선언되어 율법이 가지고 있던 죄의 정죄 기능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에게 “그렇다면 율법을 폐기해도 된다는 말인가?”라고 질문했다. 그들은 한편으로 로마제국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율법의 전통을 귀히 여기고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는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율법과 복음이 어떻게 조화롭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율법 폐기론자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답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에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듯이, 바울 또한 율법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나’라는 존재가 이전과 달라졌기에, 율법과 맺고 있던 관계가 새롭게 재편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 4절에서 이 점을 명확하게 정리한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라는 목적어가 중요하다. 율법 아래에 계속 머물러서는 결코 맺을 수 없는, 더욱 풍성하고 충만한 열매를 그리스도 안에서 맺으라는 것이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요한복음 15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가지가 스스로 아무리 애써도 나무를 떠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율법 아래에서만 머무는 삶은 열매 없는 삶이 되기 쉽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규제하는 데에는 유익하지만, ‘궁극적인 생명의 열매’, 곧 은혜의 구원과 성령의 능력을 통한 영적 성숙을 가져다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는 말씀이 7장 6절에 나온다. 이 말은 그저 계명의 문자적 준수에 머무는 율법주의적 신앙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으로 옮겨가라는 초청이다. 예수님께서 고별설교(요 13~17장)를 통해 가르치신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써 참자유를 얻고, 더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기쁨이 충만해지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실제로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은혜와 율법 사이의 균형을 잡지 못할 때 커다란 문제가 발생해왔다. 율법주의와 율법폐기론, 이 두 극단은 교회를 약화시켰다. 율법주의는 지나친 정죄와 심판을 낳아, 서로 간에 자비와 용서가 없어지고, 신앙생활을 메마르게 만든다. 반면 율법폐기론에 빠지면, 죄를 가벼이 여기고 안일한 방종으로 빠지기 쉽다. 은혜의 복음이 아무리 강조되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 둘 중 어느 한쪽이 완전히 무너지면, 신앙의 균형이 망가진다.
이렇듯 로마서 7장은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이라는 비유를 통해, 어떻게 보면 상당히 난해해 보이지만 결론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과거에는 율법이 마치 ‘남편’처럼 우리를 다스리고 정죄했지만,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내가 ‘죽었으므로’ 율법이 나를 더는 결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율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율법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고 우리가 죄를 인식하도록 돕는 거룩한 기능을 한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가 율법의 저주 아래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代贖)으로 우리의 죄를 몸소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 나는 “영의 새로운 법”, 곧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발적 순종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더욱 실제적으로 적용해보면, 신앙생활에서 “이건 죄이니 하지 말아야겠다”라는 ‘두려움’에 의한 순종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차원의 능동적 섬김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이 과정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다른 서신들에서 반복해서 강조한다. 특히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는 말로, 율법적인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설명해준다.
한편 이러한 교리를 구체적 일상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영적 성찰과 기도, 그리고 말씀 묵상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장재형목사는 이 로마서 7장의 혼인 비유에 대해 강해할 때,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자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열매, 곧 영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고 강조한다. 곧,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단지 ‘금지’를 통해 죄를 억제하는 데 그쳤지만, 이제 성령 안에서는 죄를 넘어서는 새로운 기쁨과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많은 성도들에게 실제적 위로와 확신을 준다. 왜냐하면, 율법의 틀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늘 자신의 죄성과 부딪히게 되고,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아는 자, 성령의 내적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랑에 감격하여 점차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게 되고,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께 드릴 열매”가 된다.
정리하면, 첫 번째 소주제에서는 “율법과 우리의 새로운 관계”가 어떻게 재정립되었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신앙의 자유”를 강조하며, 율법이 결코 폐기되지 않았지만 이제 더 높은 차원, 즉 은혜의 지배 아래서 참된 순종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 핵심이라 하겠다.
2) 율법의 기능과 인간의 한계
로마서 7장 중반부로 가면서 바울은 “그렇다면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냐?”라는 의문에 답한다. 바울의 선포에 따르면, 율법은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는 기능을 한다. 다시 말해, 율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이 없었다면, 인간은 마음으로 탐심을 품는 것이 죄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율법은 참으로 유익하다. 율법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내가 얼굴에 묻은 때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 거울이 있어야 비로소 나의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죄의 간교성’이다. 율법이 알려주면, 즉 “이건 죄이니 하지 말라”고 말해주면, 인간은 오히려 더 호기심을 느끼고 해보고 싶어 하는 내적 욕망이 싹트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절대 이 장난감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면 아이가 괜히 그 장난감을 더 만지고 싶어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게 바로 죄가 계명을 빌미 삼아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 모습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 8절에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고 고백한다.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 것인데, 죄가 그것을 이용해 인간을 넘어뜨리는 상황이 벌어지니, 인간의 비참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는 창세기 3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셨는데, 사단(뱀)은 그것을 계기로 하와에게“과연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이것을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까 두려워 숨기시는 것 아니냐?” 하고 유혹했다. 따지고 보면 그 법(“먹지 말라”)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죄가 그 법을 역으로 이용하여 아담과 하와를 미혹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실낱같은 의심과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금지된 열매를 먹고 말았다. 바울은 이 세계가 얼마나 간교하고 복잡한지를 설명하면서, 율법이 “죄를 드러내는” 선한 기능이 있지만, 그 죄에 빠져버린 인간의 실존이 워낙 연약하기에 오히려 죄에 휘둘릴 가능성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이 결코 “율법이 죄다”라고 결론지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이지만 죄가 문제임을 더욱 부각하려 한다. 로마서 7장 12절에서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못 박는다. 여기서 드러나는 신학적 메시지는 명료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은 선하나, 죄에 오염된 인류가 그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불가능성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은혜’를 갈망하게 만든다. 즉 율법은 크고 거룩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결국 인간에게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만드는 교사(師) 역할을 수행한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바울은 이런 논지를 전개하면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밝힌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했다”라는 말은, 율법이 죄를 억제하고 보여주는 기능이 있지만 그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시사한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 또한 로마서 강해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은 율법의 가르침만으로는 뿌리 뽑히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이 강조되면 될수록, 인간의 욕망은 다른 방향으로 발산되려 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이는 무슨 말인가? 율법의 순기능은 죄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 죄를 제거하는 근원적 힘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있다. 다시 말해, 율법은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려주고, 그에 따라 인간은 “나는 이제 더는 소망이 없으니,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밖에 길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대체 왜 필요한가? 바울이 말하는 요점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는 첫 번째 단계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누군가가 스스로를 의인이라 여긴다면, 그는 율법의 기준 앞에 설 때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 사실을 통과해 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없다. 결국 율법은 하나의 ‘터치 라이트(touch light)’나 ‘플래시’와 같아서,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죄를 비추어 보여준다. 그 빛으로 인해 죄의 실상이 드러나니, 믿는 자는 “아, 내가 이런 죄인이었구나” 하고 통곡하며 회개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율법은 죄의 실체를 드러내고 억제할 수 있을지언정, 죄를 근본적으로 없애는 힘은 없다. 그 지점에서 반드시 그리스도께로 옮겨가야 한다. 그래야만 속죄의 은혜가 주어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의 싸움에서 실제적인 승리를 맛볼 수 있다.
바울이 이 장에서 말하는 ‘곤고함’이란, 율법이 얼마나 선한 것인지 알지만, 자신이 그것을 지킬 힘이 없음을 깨달을 때 오는 고통이다. 한없이 높고 아름다운 기준 앞에서 자신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다는 절망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것은 결코 바울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신실한 성도들도 같은 고백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이 선한 줄 알고, 그 길이 옳은 줄 알지만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는 곤고함은, 우리가 복음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내려놓지 않으면 결국 치명적인 절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7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해결책을 찬양으로 선포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 이어지는 결론 말이다. 율법이 죄를 드러내어 우리를 절망케 했지만, 그 절망 한복판에서 십자가의 구속(救贖)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소망을 얻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율법의 기능과 인간의 한계”라는 두 번째 소주제의 핵심이다. 율법이 아무리 정교하고 완벽해도,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은 그 법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 결국 인간 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탄식이 솟아나지만, 그 탄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희망으로 이어진다.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문지기요, 우리의 무능과 한계를 폭로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3) 성도의 내적 갈등과 은혜의 승리
로마서 7장 후반부에는 바울 사도의 유명한 고백, 곧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라는 탄식이 등장한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일 것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의 습성과 육신적 본성이 남아 있어, 때로는 넘어지고 죄짓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것을 자꾸 행한다”라고 울부짖는 바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이 문제는 단순히 “성도가 죄를 지으면 다시 정죄를 받느냐, 아니냐”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바울은 그보다 더 깊은 영적 실존의 갈등을 말한다. 그는 한편으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한다. 이것이 곧 ‘거듭난 내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자아이다. 동시에 “내 지체 속에는 또 다른 법, 곧 죄의 법이 있어 나를 사로잡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육신적인 본성, 아담적 죄성이 여전히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개의 법이 서로 대립하니, 성도 안에는 날마다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탄식이 터져 나온다.
여기서 핵심은, 바울이 이 고백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완전히 패배의식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당대 가장 열정적인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복음을 위해 온 생애를 헌신한 자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나는 부족하고, 원하는 선은 이루지 못하며, 내 안에 죄가 나를 넘어뜨린다”고 한다. 이는 기독교 영성의 아름다운 역설을 보여준다. 곧, “연약함을 자각하는 자야말로 은혜를 붙들 수 있고,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자는 은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자주 인용했던 구절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바울이 로마서 6장과 8장 등을 통해 계속 강조하는 것처럼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라.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라”라는 선언이다. 성도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인 자가 아니며, 비록 죄의 유혹과 습관적 약점으로 인해 넘어질 때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죄가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육신은 남아 있어 갈등이 있지만, 이제 죄의 지배는 끝났다는 것이다.
로마서 7장 24절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절규에 곧바로 이어지는 25절이야말로 절정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결국 이 싸움에서 승리케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은혜가 곧 성도의 소망이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과 갈등, 반복적인 실패와 죄의 고통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감사와 찬양을 터뜨린다. 이는 곧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져내시는 분”에 대한 확실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며, 동시에 구원의 완성이 우리 힘이나 의가 아닌 온전한 은혜에 달려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내적 갈등과 은혜의 승리에 대해, 장재형목사 역시 신앙상담이나 설교에서 자주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악습과 죄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진실로 경험한 성도라면, 이전에는 무감각했던 죄들이 더욱 선명히 보이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더 괴로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 안에서 ‘영적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더 깊은 회개와 참된 거룩을 갈망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말씀과 기도로 무장할 때, 우리는 점차로 죄의 세력을 이기는 실제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비록 완전 무결한 ‘죄 없음’에 도달하기는 어렵더라도, 죄가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신다는 확신 속에 살아갈 수 있다.
로마서 8장에 이르면,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유명한 선언을 한다. 바로 이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7장에서 바울이 통렬하게 고백한 내적 분열과 좌절,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궁극적 승리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지만, 예수님이 나를 건지셨기에 나는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라는 역설은 바울 서신 전체를 관통하는 은혜의 복음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이 로마서 7장의 ‘투쟁’을 다룰 것인가? 첫째, 자기 죄를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둘째, 그 죄를 벗어나고자 하는 진지한 갈망이 필요하다. 셋째, 그 갈망을 이루는 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성령의 동역하심이다. 바울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 앞에서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고 울부짖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 은혜를 붙든 자는, 율법의 죄책감에 눌려 사망의 공포 속에서 갇혀 지내지 않는다. 오히려 죄와 끝까지 싸우되, 넘어지고 쓰러져도 주님의 구속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서며, 결국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쪽으로 나아간다. 바울이 7장 끝에서 보여준 태도가 바로 그렇다.
이처럼 로마서 7장은 구원론과 성화론이 만나는 실존적 현장을 보여준다. 믿는 이가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이렇게 죄에 시달리는가?”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답해주는 장이라 할 수 있다. 이미 구원은 이루어졌지만, 아직 이 땅에서의 삶은 영적 전투가 계속된다. 따라서 신자는 매일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훈련을 쉬지 않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율법은 우리의 발목을 잡기보다는, 오히려 “내 안에 남아 있는 죄”를 조명해주는 역할을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의”를 그려주는 표지판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수고나 노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할 때, 그리스도의 은혜는 더 찬란히 빛난다.
끝으로, 바울은 로마 교회의 유대인 출신 성도와 이방인 출신 성도가 함께 듣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율법에 대한 오해를 제거하고자 했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고, 그 율법이 죄를 폭로함으로써 도리어 사망이 들어왔으나, 그것이 율법 자체가 악하거나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죄가 인간 안에서 계명을 빌미 삼아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은혜의 복음이 왕성하게 선포될 때, 그것이 곧 율법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보다 온전한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임을 설득한다. “나는 곤고한 인간이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었다”라는 것이 결론이다.
실제로 신앙생활을 오래 해본 사람은 안다. 처음에는 감격과 기쁨으로 출발하지만, 어느 순간 자기 안에 여전히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하고, 그 그림자가 죄의 본성으로 인해 또다시 고개를 든다는 사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때 우리는 “아, 나 같은 죄인이 무슨 자격으로…” 하며 낙심하기 쉽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한다”라고 선언한다.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이것이 복음의 역설이다. 죄가 깊이 드러날수록, 십자가의 은혜 또한 크게 부각되고, 결국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적 갈등과 투쟁이 결코 헛된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의 승리를 체험하게 하는 통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 로마서 7장이 가진 심오한 의미다.
요약하면, 세 번째 소주제에서는 “성도의 내적 갈등과 은혜의 승리”라는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참된 성도라면 율법과 죄 사이에서 겪는 실존적 고뇌가 반드시 있지만, 그 끝에서 발견되는 것은 우리를 건져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신자는 고백한다.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7장의 깊은 울림이며, 동시에 8장으로 이어지는 자유와 승리의 찬가로 인도하는 전환점이 된다. 그리고 이 장(章)의 메시지는 오늘날을 사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죄와의 싸움 한복판에서 “은혜 아래 있음”을 확신케 함으로써 진정한 위로와 격려가 된다.
정리하자면, 본문 전체를 오직 3개의 소주제로만 묶었을 때 첫째는 “율법과 우리의 새로운 관계”를 다루었다. 바울은 결혼과 죽음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여,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결박하지 못함을 설명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누리는 영적 자유이며, 그 자유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둘째는 “율법의 기능과 인간의 한계”를 다룬다. 율법은 분명 거룩하고 선한 것이지만, 죄의 간교함과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오히려 사망에 이를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결국 율법은 인간에게 자신의 죄를 직시하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절감하게 한다. 셋째는 “성도의 내적 갈등과 은혜의 승리”이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우리 안에는 육신적 본성과 죄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거듭된 갈등이 발생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을 바라볼 때 궁극적 승리를 경험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이렇게 로마서 7장은, 구원의 과정에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투쟁해야 함을 설명해 준다. 그것은 우리의 진짜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어가는 중에, 여전히 과거의 죄성과 싸움을 멈출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은혜의 측면에서 보면, 그 싸움조차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의미 있고 결실을 맺게 된다. 율법은 결코 폐기되지 않았으나, 더 이상 정죄의 기능으로 우리를 사망에 묶어두지 못하고, 대신 우리에게 죄를 알게 하는 유익을 제공한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었을 때, “나를 건져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감사하리로다”라는 믿음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이것이 로마서 7장을 꿰뚫는 핵심 진리이며, 장재형목사도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해 온 메시지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죄와 투쟁하는 우리의 실존은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와 찬양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우리는 실제적인 성장과 내적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신앙의 길을 걷는 모든 이에게 로마서 7장은 ‘구원의 성화 단계에서 겪는 필연적 싸움’을 정직하게 마주하게 하며, 동시에 ‘그 싸움이 결국에는 은혜의 승리로 귀결될 것’을 알려주는 소중한 장(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