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의 십자가의 길은 사순절의 매일 묵상집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는 우리 크리스천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보혈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선언은 매우 유명하다. 오늘은 장재형목사의 사순절 묵상집 – 십자가의 길을 중심으로 나눠보고자 한다.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바울이 썼을 것으로 추측)는 모두 성경의 일부인 바울의 편지로 각각의 목적이 있다. 장재형목사의 강해를 보면 이렇게 성경의 각 권이 쓰인 목적을 먼저 언급하며 내가 저자의 목적을 따라 읽도록 도와준다.’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바울이 썼을 것으로 추측)는 모두 성경의 일부인 바울의 편지로 각각의 목적이 있다. 장재형목사의 강해를 보면 이렇게 성경의 각 권이 쓰인 목적을 먼저 언급하며 내가 저자의 목적을 따라 읽도록 도와준다.
로마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대한 가르침과 격려를 전달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
로마서는 기원후 56년경에 바울에 의해 작성되었다고 추측 되는 데,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냈다. 로마서의 작성 시기는 바울의 선교활동 중기로 추정되며, 그가 처음으로 로마에 방문하기 전 몇 년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으로 생각 된다. 로마서는 바울의 선교활동을 통해 쌓은 경험과 그의 교리적 이해를 반영하며, 로마 교회에 대한 가르침과 격려를 담고 있다.
로마는 그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으며, 로마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울은 이들 사이의 화합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교리를 다루었다.
고린도전서, 후서
고린도전서는 대부분 기원후 55년경에 바울이 썼는데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는 그들의 도덕적, 종교적, 예배적 문제들에 대한 지도를 하고 있으며 그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 쓰여졌다.
고린도후서: 고린도 교회에 두 번째로 보낸 편지로, 바울은 이전 편지에서 다루지 못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 특히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경고, 자선과 목사의 중요성 등이 이 편지에서 다루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우들의 신앙의 성장과 진보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왜냐면 고린도 교회에는 분열과 당파주의, 도덕적 습관의 문제, 그리스도인들 간의 소송 문제, 예배의 방법에 관한 논쟁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보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와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그들을 교정하고 도와주기 위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고, 방문하여 지도와 조언을 했는데 그 그들에게 사랑과 관용을 가지고 접근하면서도, 동시에 교회의 건강한 기초를 구축하기 위해 엄격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흔히 고린도 전서와 후서 두번의 편지만 보낸게 아니라 두어 차례 더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는 데 우리는 바울 사도의 말들을 그가 개척한 교회가 아주 잘 들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고린도 전 후서를 보면 바울이 그가 개척한 교회 성도들로 인해 얼마나 고통 받았는 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쫓겨나기 까지 했으니까.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복음서’라고 불리기도 한다.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는 유대인들에게 얽매인 율법주의에 대한 경고와 자유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쓰여졌다. 그래서 내가 이 갈라디아서를 정말 사랑한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와 새로운 언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약속의 자녀냐 율법의 자녀냐? 이런 내용인데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지만 은혜를 잃어버렸을 때 혹은 우리에게 자유를 억압하려는 자들에게 중요한 무기와 같은 말씀들이라고 생각한다.
히브리서
바울이 쓴 편지다 아니다 다른 사람이 썼다라는 이견들이 있지만 바울 말고는 이렇게 쓸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었으랴? 이 편지는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졌으며(흔히 히브리인들은 유대인들을 지칭한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 성서의 예언들을 어떻게 이행하였는지를 설명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을 격려하고 굳게 하기 위해 쓰여졌다.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
장재형(장다윗,올리벳대학교 설립자)목사는 로마서,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 갈라디아서를 모두 강해 설교를 했다. 2003년 경 미국으로 간 장재형목사는 로마서를 본문으로 아주 많은 설교를 했었다. 로마서 1장을 보문으로 한 설교만 해도 1백번이 넘는 것 같은데 갈라디아서는 수년 전에 강해 설교를 했고 최근에는 고린도 전서와 고린도 후서를 강해 설교로 마쳤다. 고린도서는 조만간 책으로 출간 될거라고 한다.
지금은 기독교에서 말 하는 ‘사순절’기간이다. 사순절이라 함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시기 전 40일 기간을 말 한다. 그 다음에 부활절이고 그 다음에 또 일정 기간을 지나면 성령강림절인 오순절이 있다. 그 다음에는 성탄절로 일년의 큰 흐름이 이렇다.
장재형목사는 대부분의 수요에배와 주일 예배 설교는 이렇게 기독교의 절기를 따라서 본문을 정해 설교를 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는 그때 마다 필요한 것을 선택해서 강해설교를 한다. 사도행전을 강해 설교 한적이 있었는데 긴 분량의 설교라면 보통 일년 이상은 해야 하더라.
고린도 전서와 고린도 후서의 강해 설교가 끝난 후 갈라디아서 강해를 새롭게 시작했는 데 이 시기가 사순절 기관과 겹쳤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6장 밖에 안되는 분량이 짧은 서신서인데 사순절이 지나고 나서 오순절 기간에 할지는 모르겠다. 장재형목사는 최근 그의 설교에서 예수님의 고별 설교를 사순절 기간 전하겠다고 언급하기도 했어서 사순절 이후가 되겠지…
보통 성경의 앞 부분에 보면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었을 때 이름을 쓰는 공간이 있다. 종종 성도들이 장재형목사에게 성경에 성구를 적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하는 데 장목사가 가장 많이 써준 성구가 ‘보혈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라고 했다. ‘생명은 생명을 낳고’라는 문구도 적어 준 사람이 있는 데 참 멋지고 근사한 말이다. 생명이 생명을 낳을 수 있는데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많은 사람을 옳은대로 인도하라는 뜻이기도 할 거다.
여러 종교에는 상징물이 있다. 이슬람은 히잡을 쓰면 무슬림이라는 것이고 불교의 스님은 딱 보면 스님이다라고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상징이 무엇인가? 목회자나 장로 집사 혹은 평신도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것을 드러내는게 무엇인가? 십자가다. 여성들은 십자가 목걸이를 하기도 하던데 남성들은 무엇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될까? 프랑스는 절대로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면 안된다고 하던데 우리 나라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해도 된다. 남성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게 무엇일까? 그건 사랑이다. 예수님이 유월절 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 것이다’라고 하셨다. 12 사도 중에 여성은 없었다.
남성들을 보면 대체로 사랑에 무감각한 이들이 있다. 여성 보다는 그 수가 확률적으로 많은 것 같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남자 아이들을 정말 잘 키워야 한다. 그들이 사랑을 알고 겸손을 알아야 나중에 근사한 교회의 일원 사회의 일원 국가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사고치는 남자들이 많은데 그들은 어릴때 가정과 교회와 학교에서 그들이 더 나은 방향으로 자랄 수 있게 가이드를 잘 해줬어야 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의 유타주가 있다. 유타 지역은 1847년 몰몬교의 최고 지도자인 브리간영(Brigham Young)이 이끄는 몰몬교도들에 의해 탐험 및 개척되었다. 이들은 중서부 미국에서 혐오와 학대를 경험한 후 서부로 이동했고, 유타 지역을 몰몬교의 신의 지평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유타 지역은 몰몬교도들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인식되었다. 주도는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이며, 미국 내에서 가장 큰 몰몬교 민족인 70% 이상의 주민이 몰몬교도다. 유타주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국립 공원들이 풍부하며, 유타 주변에는 볼 수 있는 명소들이 많다고 한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유타 주의 아치스 국립공원(Arches National Park)이며, 자연스러운 화강암 활주로와 수많은 천연 아치로 유명하다.
장재형목사(장다윗목사, 올리벳대학교 설립자)가 종종 이야기 하는게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시티이다. 거기는 사람들이 술을 안 마시니 도시에 술을 안 팔고 사람들이 커피도 안 마신다고 한다. 술과 커피가 건강에 안 좋다고 해서 그들이 종교적으로 이것들을 취하면 안된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도시가 매우 깨끗하고, 사람들도 매우 순수하더란다.
그런데 그 엄청난 도시에 빠진게 있다는게 장재형목사의 설명이다. 그게 뭔가?
십자가다.
장재형목사는 가장 중요한게 그 도시에서 빠져 있었다고 종종 이야기 하곤 한다. 참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대속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목사구나 라는 것이 느껴진다.
오래 전 중국에 비지니스를 하던 사람이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차에 타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밤에 한국에 도착을 했는데, 그 때 그분이 하는 말이 “한국에는 왜 이렇게 병원이 많나요?”라고 했다는거다. 한국 곳곳에 빨간 십자가가 많으니, 그분은 그것을 병원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은 십자가가 많다.
그리고 새가 운다고 표현하는 국민이다. 문풍지가 운다고 한다. 새가 운다…우리 나라 국민들은 이렇게 한에 대해서 잘 아는 국민이다. 그게 자연스럽다. 아내가 좋아했던 프로그램이 ‘트롯’에 관련된 것이었다. 어느날 운전 중에 아내가 스마트폰으로 한 클립을 보더라. 그게 이미자씨의 노래를 아주 어린 초등학생이 부르는데 운전하는 내가 눈물이 나더라. 어린 아이가 어릴 때 부모가 아닌 조부모의 손에 길러진 것 같은데 벌쩌 저런 감정을 표현핸다는 것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전 세계의 인구 중에서 아시아 인구가 60%라고 한다. 아시아가 어떤 지역인가? 인구는 많고 노동력이 값싸고 이제 막 일어나는 국가들이 여럿있다. 그리고 세계의 중심축이 옮겨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아시아의 나라 중에 기독교 나라가 있는가? 특히 개신교 나라가 있는가? 필리핀은 가톨릭 국가이고 그 외에 개신교의 나라는 한국 외에는 없다.
통계를 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한국과 미국인데 이 두 나라가 내보내는 선교사의 숫자는 거의 비슷하다는 통계가 나왔다.
선교사가 되자면 먼저는 스스로의 결단이 있어야 하고 그 안에 뜨거움이 있어야 한다. 또한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 한국이 기독교역사에 있어서 이렇게 크고 중요한 나라가 되었는가?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세월이 지나, 한국 교회는 부흥해서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는데 장재형목사(장다윗목사)는 천번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다녀봤는데 세계 곳곳에 한국인 선교사들이 다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등 요소요소에도 한국 선교사들이 다 들어가 있는데 장재형목사는 한국의 기독교의 힘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그것은 한국인의 감성인데 그것은 바로 눈물이라고 했다.
한국은 “새가 운다”고 말하는 나라이다. 고난을 수도 없이 경험해서 눈물이 있는 나라다. 함석헌 선생이 이와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다. 침략을 받았을 뿐 침략하지 않은 나라라고. 그래서 정서적으로 심정적으로 십자가를 잘 이해하는 민족이 된 것이라는게 장재형목사의 생각이다. 기독교 상징이 고난의 십자가인데, 그것은 따지고 보면 눈물의 십자가이다. 한국의 국민들이 이것을 깊이 있게 잘 이해했는데 이것은 감성이지 교리는 아니었다는 거다.
장재형목사(장다윗목사)가 교회를 시작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의미를 잘 새기자는 뜨거운 결단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죽임을 바로 알고자 했다는 거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순절 기간이 아주 특별하다. 교회의 시작이 이 사순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우리의 물음에 대한 해답이 다 있습니다. 계시의 빛이 비추어졌고, 그 빛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의 기초를 놓았고 성경을 편집했기 때문에, 성경은 보통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아주 깊고 깊은 책입니다.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교리는 히브리서만 빼고 다 이미 공부를 했습니다. 히브리서는 금년에 공부를 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이 고상한 지식을 가지고 많은 백성을 제자 삼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들의 권세이고 또 하나는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대사명의 권세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 중에 제일 중요한 초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장면을 오늘 예배의 말씀으로 귀하게 삼으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겠습니다.” 장재형목사(장다윗목사)는 ‘다 이루셨다’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그리고 주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명하신 대사명을 이뤄야함을 역설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빌립이라는 집사가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구약에 보면 내시는 총회에 들어갈 수 없는 자였다.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자가 내시이다. 이디오피아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권세 있던 내시가 전도가 되어서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난 후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성령께서 빌립에세 이 내시를 만나게 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이 생각났던 것 같다.
사도행전 27장 27절 28절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 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은 정말 먼 거리였다. 그 그런데 그는 거기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돈도 많고 권세도 있던 자였지만 거세된 그는 그 안에 분명 슬픔이 있었을 거다. 슬픔이 있는 자가 십자자에 관심이 있다. 십자가의 고통에 그가 관심이 있었던거다. 예수님의 그 고통에 그가 관심을 가졌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었고 그가 읽던 곳은 바로 이사야서 였다.
돈도 많고 권세도 있던 자가 성경 말씀을 사랑하기 쉽지 않다. 놀고 먹고 즐길 시간도 부족할 수 있는게 아닌가? 그런 그가 성경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아셔서 그 내시에게 소중한 복음을 주고 싶었던것이다.
사도행전 28장 29절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오…빌립이 이 성령의 말씀을 듣고 어떠했을까? 예를 들어서 우리 나라의 총리가 어디 길을 가는 데 성령께서 나에게 ‘총리 앞으로 나아가라’ 이랬을 때 나는 어떻게 할까? ‘주님 그럴수 없나이다”하지 않았을까? 내가 총리 앞에 나간다면 경호원들이 가만 두지 않을거다. 빌립이 그러했다. 빌립은 기층에 있던 사람인데 성령께서 경호원도 있었을 거고 큰 마차 앞으로 나가라고 하신거다. 이것을 보면,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이 쓰여진게 기원후 60년 경인데 이 때 이디오피아가 어떠했는가? 이디오피아는 상업적인 번영과 유대교와의 접촉 등 다양한 문화적, 경제적 변화를 경험한 시기였다.
사도행전 8장 30절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여기 문답이 시작되었다. 빌립이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던거다.
“31절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깨닫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집사와 신분이 높은 자와의 대화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삭개오도 그러했다. 주님을 만나고 싶었고 드디어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그가 변화되어 성경에 기록된게 아닌가? 이것을 보면, 우리에게 언제 구원의 손길이 찾아오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으면, 성령께서 그런 사람을 주목하신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말씀을 읽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말씀이 끊어지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 우리의 삶이 메말라지고 영감을 잃어버리게 된다 고상한 지식이 메마르면, 우리의 모든 삶이 메말라지게 되고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 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다. 그가 읽던 곳은 바로 이사야서 53장이었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묻는 것들이 있다.
“너희는 어떤 사람이 될거니?”
돈을 많이 벌거야. 돈 벌어서 강아지 사서 강아지 두 마리를 키워야지. 그리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예쁜 옷도 입고 결혼을 해서 아이들도 낳아야지
대략 이런 말들이 오고 가는 데 내가 계속 질문을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제서야
“아, 주님을 위해 사는 건 기본적인거야 아빠. 말 하지 않아도 알아”
그렇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 가가 정해지고 그 방향성이 정해지면 돈을 버는 것도 그 방향을 위한 것이 되고 강아지를 사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또한 그 방향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된다. 존재가 존재의 목적과 이유를 상실하게 될때 우리는 바다 위를 그저 떠 다니는 배와 같이 되는 거다.
이사야서 53장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다니엘7장의 모습이었습다. 그들은 지금 내시가 지금 타고 있는 병거보다 비교할 수 없는 병거를 타고 수많은 천군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 예언서에 이렇게 다른 것이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난의 주가 이 땅에 와서 찔림을 받고 수난을 받는데, 그렇게 그는 우리 죄를 다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이 예언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은 교리적인 말로는 대속(代贖), 구속(救贖)이라고 한다.. 속(贖)이라는 것은 교환한다는 것으로 대신 죄를 지고 죄를 사하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가 형벌을 받던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던지 해야 한다. 이 두 개의 길 밖에 없다. 그 대속의 예언이 여기(이사야 53장)에 있는 것이다. 내시는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인지 빌립에게 묻는 거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대해서도 장재형목사(장다윗목사)는 절절하게 설명해놓았다.
내시는 빌립에게 올라와서 앉으라고 한다. 성경을 알고자 하는 자가 많이 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주께서 “이 성에는 내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셨다. 고린도는 사람들이 너무 반질반질하고 철학을 사랑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상업적이고 퇴폐한 도시여서 거기서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두려워했다. 그러자 주께서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던 것이다.
나는 이 부분,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라는 이 말씀은 꼭 쿠오바디스라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떠 오른다. 로마가 불에 타고 있을 때 베드로 사도가 로마를 버리고 떠나는 그 길에서 어떠한 한 청년이 급히 로마로 들어가더란다. 가만히 보니 십자가에서 한번 죽으셨던 주님이 다시 그 로마로 들어가고 계셔서 베드로가 놀라 묻는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는 네가 버리고 떠난 로마에 있는 이들을 위해 다시 죽으러 들어간다”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다시 로마로 들어갔다는 그 소설의 내용 말이다.
한번의 부인이 얼마나 큰 상처로 베드로에게 남았을까? 하늘 나라에는 시간의 개념이 없을 텐데 이 땅에서의 사순절만 되면 베드로의 부인에 대해서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듣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한번의 부인이 베드로 사도에게 영원한 고통으로 남은게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늘에서 불수레를 타고 오는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이사야서에는 메시야가 고난을 받을 뿐 아니라 생명을 우리의 죄를 위해 내어 준다는 것이다. 그가 질고를 받고 찔림을 당한다고
사도행전 8장 34절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내시는 물었다. “이게 누구입니까? 선지자 자신입니까? 아니면 타인입니까?” 내시는 이것이 너무 알고 싶은 것이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이 질문을 했었을 법하고 그 해답을 얻을 법도 한데, 못 얻은 것이 분명하다.
사도행전 8장 35절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빌립은 그분이 바로 예수라고 가르쳐주었다. 이게 하나님의 아들의 현현의 방식이다. 장목사는 이야기 한다. 위대한 연극은 비극이라고. 그 비극이 냉정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의 이 내용은 너무 비극이고 슬픔인데 이걸 듣는 사람들의 냉정하면 안된다. 죽음에 대한 묵상이 없으면 안된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주께서 나타나셔서, 두 개를 이야기하셨는데 장재형목사는 그건 분명 하나는 레위기이고 또 하나는 이사야서였을 거라고 한다. 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에 대한 예언이 풀어졌을 때, 제자들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뜨거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이다. 장재형목사(장다윗목사)가 교회를 시작할 때 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시작했다고 했다. 왜냐? 믿는 이들이 죽임과 죽음을 혼돈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주께서 죽임 당하신 것을 생각하지 않으니까, 믿는 자들이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지 못 하는 게 아닐까?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그제서야 사람들이 처음으로 주님의 그 고통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 전에도 이미 깊은 고통의 세계가 있었다.
장재형목사(장다윗목사)는 이렇게 말 한다. 그 사람들안에 그것이 교감되지 못했던 것이라고. 왜 서양 철학과 사유의 방식으로는 그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도 그 고통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거다. 예정을 이해하는 시각이 무엇인가? “죽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이걸 묵상해보자. 죽음인지, 살해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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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와 동역자들 ( 맨 오른쪽이 장목사)
올리벳대학교 창립 20주년 기념식의 기조연설 중인 장재형목사(2023년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