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스승인 장재형목사가 2003년 부터 사순절 기간에 설교를 한 것을 정리해서 낸 책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십자가의 길은 요한복음 18장과 19장을 중심으로 편집되었는데 오늘은 요한복음 18장과 19장 전체적인 그림을 보려고 한다. 세세한 것을 봐도 좋지만 또 전체의 주제를 놓쳐서는 안된다. 렘브란트의 그림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라는 그림과 함께 성경의 내용을 묵상해봤다.
그림에 대한 것과 묵상은 개인적인 것이니 그냥 참고만 하면 된다.
한국은 광고가 넘치는 나라이다. 도시를 가도 시골 어디를 가도 현수막이 여기 저기 걸려 있다. 개신교에서도 종종 혁수막을 내건다. 누가 저런걸 내 걸었나 보면 지역 기독교 연합회나 혹은 그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영광을’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저 현수막을 언제 보느냐면…사순절 기간이다.
부활절 새벽에 현수막을 길거리에다 걸면 어떨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기간에 ‘부활절 현수막’을 보면 이상하다. 이른 성탄절 분위기는 반기지만 고난 기간에 부활절 현수막을 보자니 이상한 이유가 뭘까? 물론 십자가의 사랑이 없이는 부활의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사도 바울도 부활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고 했던 것 처럼 말이다.
그건 현수막 광고를 하는 교회의 결정이긴 하다. 그걸 돈 받고 제작하고 광고를 걸어야 하는 업체의 책임이기도 하고
오늘 보고 싶은 건 렘브란트이다. 렘브란드가 그린 작품들 중에서 사순절에 맞는 작품들을 보고 작품에 대해서 알아보고 또 작품과 성경의 말씀들 중 공통되는 걸 묵상해보려고 한다.

렘브란트 반 레인(1606~1669) Descent from Cross 163 oil on canvas. 158*117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 페테르부르크
요한복음 18장은 예수님을 유대인과 대제사장 그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재판하는 장면, 그 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지배자인 빌라도가 재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재판장면을 요한복음 18장에 그려놨다.
그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셔서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장면이 19장에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18장과 19장을 구체적으로 보는 것도 좋지만 큰 그림을 보자면 재판과 십자가의 죽음이다.
어제 렘브란트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 지는 그리스도’라는 작품에 대해서 읽고 듣다가 누군가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너무나 듣기 싫어서 꺼버렸다. 이는 마치 예루살렘에서 겟세마네로 가실 때 그 양의 피가 흘렀을 그 시내를 건너는 데 제자들은 노래를 부르며 찬양하며 갔다는 그 구절을 생각나게 했다. 예수는 죽음을 각고하고 이제 겟세마네로 기도하러 가시는 데 제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장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나 또한 마찬 가지이다. 그런데 다른 마음도 있다. 왜 예수가 이 땅에 오셨어야 했는가? 이다.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를 죄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거다. 이걸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왜 오셨어야 했느냐이다. 안 오셨어도 되었다. 우리를 죄로 고통 받게 내버려 둘수도 있는거 아닌가? 당연히 예수가 이 땅에 와야 했는가?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내셔야 할 책임이 있으니까 우리를 위해서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내려 보내야 했는가? 그것도 종의 형체로?
이 양가 감정이 크리스마스에는 나는 늘 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어야 했는가? 하나님께서 당연히 예수를 이 땅에 보내야 할 책임이 있는건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왜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우리는 합당한 자들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들인가?
동성애자를 축복한 감리교의 한 목사가 이런말을 했다.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은 저들을 사랑하실 테니 나 또한 저들을 사랑합니다”
이 감리교목사는 면직 출교 당했다고 하더라. 면직 출교가 뭔가? 너는 더 이상 감리교 목사 아니니까 너 감리교를 떠나라는 거다.
디즈니 플러스를 친척이 구독하고 있어서 우리 집에도 디즈니 플러스를 그 계정으로 로그인해서 디즈니 플러스를 종종 아이들이 본다. 최근의 일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정치적 올바름 소위 ‘PC’라는 게 대두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게 크게 보면 인종이나 성별 피부색 때문에 차별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운동이다. 어떻게 보면 아주 맞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운동하고 있는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해야 하지만 세상을 보면 꼭 그런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디즈니는 이것을 대하는 태도를 PC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구축하고 만들어놨던 컨텐츠에 수정을 가하기 시작했다. 디즈니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디즈니를 보지만 실제적으로 디즈니는 미국의 플로리다에 위치해 있다.
9CGH+VP 베이 레이크 미국 플로리다
어릴 때 흑백 tv로 나는 톰과 제리, 그리고 미키마우스 인어 공주등으 보면서 자랐다. 우리 나라에 있는 에버랜드의 노래 가사 중 “꿈과 희망의 나라로 오세요”라고 되어 있는 노래 가사 처럼 디즈니는 그렇게 꿈과 희망이었다. 이 만화를 보면서 웃고 즐겼다.
그런데 플로리다는 미국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미국의 역사로 올라가보자. 링컨 대통령이 살아 있었던 때다. 1861년부터 1865년에 미국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북부와 노예 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는 남부 사이에 일어났던 내전이다. 미국의 노예제는 남북 전쟁에서 남군이 패배함으로써 폐지되었다.
노예 제도를 지지 했던 남쪽에 위치한게 플로리다이다. 정치적인 색채가 보수적이라는 거다.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남쪽인데 흑인들은 차별이 심했던 남쪽을 떠나서 노예제도를 반대한 노예들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북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왜? 일을 하면 돈을 평등하게 주고 자유도 얻고 사람 같이 살게 되니까 당연한거 아닌가? 흑인들은 북쪽으로 가고 남쪽에는 백인들이 많이 살게 된거다.
플로리다도 마찬 가지다. 그 백인 중심의 지역에 디즈니가 있는 거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다. 그런데 디즈니에서 주장하고 나온게 뭔가? 정치적 올바름이다. 소위 디즈니가 pc를 지지하고 나왔다. 그래서 디즈니에서 그 이후에 만들어지는 작품들을 보면 인어공주 실사화를 했는데 흑인 여주인공을 썼다. 왜냐? pc다. 지금까지 인어 공주는 백인에게만 주어졌는데 흑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거다. 그러면 흑인에게 인어공주 여주인공을 맡게 하면 백인은 차별 당하는게 아닌가?
나의 추측이 아니라 디즈니에서는 PC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우리 나라의 한 기업에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건 쉽지 않다. 미국이라도 마찬 가지다.
타겟이라는 미국의 마트가 있었다. 그런데 이 마트에서 6월엔 동성애자를 위한 달로 이 달을 매년 기념했다. (기념할게 따로 있지) 점점점 과감?해 지기 시작해서 결국에는 여자들이 입는 그런 수영복을 무지개색으로 만들어 놓고 남자 마네킹에게 입혀 놓은거다. 이게 뭔 짓이냐?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지. 그래서 타겟의 주가는 곤두박질 쳤다.
버드 와이저라는 맥주가 있다. 이 맥주는 미국에서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던 1위 맥주회사이다. 그런데 이 버드와이저가 트렌스젠더를 모델로 기용해서 광고를 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을까? 정치인 연예인 가수 할 것없이 버드와이저 맥주를 까기 시작했다. 그다음엔 1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기업이 자신의 정치적인 목소리를 낼수는 있다. 또 비단 이게 정치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옳고 그림의 목소리라고도 한다면 자신들은 그런 목소리를 낼수도 있다.
다 좋은데 결과적으로는 나는 버드 와이저 안 마시고 타겟 보다는 월마트를 가고 디즈니 보다는 넷플릭스를 더 좋아한다.
감리교에서 면칙 출교 당한 사람에게 묻고 싶더라
“하나님이 인간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으신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실 책임이 있으신 분인가?”
내가 배운바로는 ‘단언코 아니다’ 내가 아는 바로도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사랑하셔야 하나? 하나님에게 인간을 빼면 하나님 그대로이지만 인간에게서 하나님을 뺀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영원과 질적인 차이가 있는 거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예수가 누구인가? 성자 하나님이다. 우리는 이걸 빼놓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런 예수님인데 이 요한복음 18장의 재판의 장면을 보면서 내가 생각했던게 있다.
이때 성부 하나님은 어떠하셨을까?이다.
우리를 사랑할 책임이 없으신 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로 고통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신 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이유가 없으신데 그분을 향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 우리의 신음을 들이실 필요가 없은데 신음을 들으시고 예수를 이 땅에 보신 그 성부 하나님을 생각해보자.
이 재판의 자리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와 계신다. 함께 하셨다. 눈에 보이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 성부 하나님이 재판을 받으시는 성자 하나님을 보고 어떠셨을까? 그리고 하찬은 로마 총독인 빌라도, 그리고 먼지와 같은 유대인들 하찬은 대제사장들 자기들이 최고라고 했던 자들,…이 자리에 예수님은 포박 당해 계신다. 이걸 바라보는 성부 하나님은 어떠했을까?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자가 누구라고 했는가? 그건 유다다. 예수를 판 유다. 그런데 그 유다는 어떤 죄를 지었나? 그냥 예수를 판자인가? 아니다. 그는 예수의 사랑을 거부한 자다. 예수의 권면을 모른채 한자다. 그 사랑을 거부하고 권면을 뿌리친 자가 유다다. 우리가 그러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는 지옥의 가장 밑 바닥에 있어야 할 자들이다. 우리 조상 아담이 그런게 아니가? 로마서에 우리가 누구의 자녀인가?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는 하나님의 자녀라기 보다는 우릭는 아담의 자녀로 더 많은 시간을 산다. 형제를 살인한 가인의 자손으로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우리가 형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의 자리에서 사는가? 우리가 형제를 판 요셉의 형들의 자리에서 사는가? 아니면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할뻔한 요셉의 자리에서 삶을 사는가?
요한복음 18장의 재판장의 모습을 내가 그린다면 그 재판장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그릴 것 같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우리는 이걸 생각해봤는가?
아주 쉽고 간단하다.
내가 너무 너무 사랑하는 딸이 있다. 내가 평생을 사랑으로 키웠다. 사랑스럽고 총명했으며 지혜로웠다. 그런데 그 딸이 결혼을 했는 데 사위라는 자가 악독한 자였다. 내 딸을 그렇게 괴롭혔다. 나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여러 사람을 보내서 권면했다. 그런데 그는 말을 안 들었다. 사위는 내 딸을 죽이려고 작당 모의를 했고 재판에 넘겼다. 살인자라는 누명을 씌워서 내 딸을 재판에 넘겼다. 재판장은 무죄라고 선고했지만 사위와 사위에게 매수 당한 언론과 시위자들이 소리쳤다. “죽여라” “죽여라” 내 딸은 유죄를 선고 받았고 십자가에서 고통받아 죽어야 했다.
그 재판을 바라보는 아빠인 나는 어떻겠는가? 무죄인데 유죄를 선고 받게 한 사위 지지하겠는가? 내 딸을 죽인 살인자 사위의 죄는 명백한데 무죄를 선고한 재판장을 옳다 하겠는가? 내 딸이 잘 죽었다고 할 아빠가 누가 있겠는가?
요즘 우리는 어떠한 사회 환경 속에서 사는가? 너무나 사랑을 잘 알 수 있는 시대에 산다. 왜냐? 강아지가 죽어도 장례를 치룬다고 한다. 그 장례식장에 가면 강아지에게 수의같은 것을 입히고 합장을 하고 좋은 관에 넣어서 화장하고 납골당에 안치한다고 한다. 이게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에게 하는 거다. 우리 나라에 애견인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애완견까지도 가족 처럼 사랑하며 사람 처럼 사랑하고 아니 어쩌면 사람 보다 더 사랑하고 살아간다. 우리 딸을 보면 나 보다 강아지를 더 사랑하는 것 같긴하다.
우리에게는 강아지까지도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우리가 내가 말한 이 재판을 이해못할 사람이 있나? 그렇다. 모든 사람은 내가 말한 이 위의 재판을 이해 못할거다.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내 애완경을 발로 차 죽였다고 생각해봐라. 그게 정당한 일인가? 살인 날 사건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8장의 재판을 보자. 어떠한 감정이 드는가? 성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 어떠한 감정이 드는가?
곰곰히 생각해봤다.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어떤 말로 표한 할 수 있을까?
“내가 이러라고…” “
이 말이 가장 접한한 표현일까? 진노의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참고 계신 것 만으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다. 나 같으면 다 쓸어버렸을 거다. 한 줌의 재로 만들었을 거다. 다 필요 없다. 노아 때 처럼 물이 아니라 불로 쓸어 버리고 다 재로 만든 다음에 다시 시작하면 된다. 벌래 같은 놈들 다 심판하고 없었던 일로 하면 된다. 내가 왜 내 딸이 죽임을 당하는 걸 가만히 지켜 봐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뒤집어 씌우면 안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면 안된다.
억울하고 애통하다.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이다. 그것 말고 뭐가 더 있겠는가?
루벤스와 렘브란트 유명한 화가들이다.
나는 루벤스 보다는 렘브란트의 작품을 더 좋아한다.

렘브란트 반 레인(1606~1669) Descent from Cross 163 oil on canvas. 158*117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표트르 대제(1672~1725)의 컬렉션에 이어 여자 황제 예카테리나 대제(재위 기간 1762~1796)가 유럽으로부터 사들인 다양한 미술품이 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여제가 1764년에 개인 컬렉션을 겨울궁전에 따로 공간을 만들어 전시하면서 ‘은둔소’라는 의미의 ‘에르미타주’라 칭한 것에서 그 명칭이 비롯됐다. 예카테리카 여제는 “나는 그림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림을 좋아한다”며 유럽에서 구입한 예술품을 친구들과 함께 감상하기 위해 겨울궁전 옆에 작은 궁전 ‘에르미타주’를 지어 소장품을 전시해 감상했다고 한다.
1634년 Descent from the Cross를 렘브란트가 그렸다. 예카트리카 여제는 못된 사람인데 렘브란트를 사랑해서 엄청나게 그의 작품을 사들이고 러시아로 가져갔다. 1612년에 루벤스가 먼저 이 주제를 가지고 그렸고, 1634년에는 렘브란트가 그것을 참고해서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당시 네덜란드는 칼빈주의의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에 성화나 성상을 교회에서 금지 했던 때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자신이 묵상한 성경을 그대로 담아 내려고 했던 것 같다.
성경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던 시대에 성경은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즉, 종교 지도자만 읽을 수 있었고 평신도들은 평신도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성화는 성경 이야기를 알려주는 방편이었고 도상학이 발전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열쇠를 쥔 자는 베드로, 성경과 칼을 찬 자는 바울이었고 요한은 붉은 옷의 미소년으로 그림렸다. 십자가에 달려 있는데 창자국과 못 자국이 있어야 예수이고 십자가에 메달렸지만 못자국과 창자국이 없는 이는 베드로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런데 그들이 외면했던 예수, 그런 예수의 시체까지도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다.. 시체가 아름다운가? 무덤의 시체까지도 사랑한 여인이 누군가?
28세의 렘브란트는 루벤스의 것을 참고하고 자신만의 성경지식과 화법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루벤스에 대한 경쟁심도 있었을 거다. 작품에서 두 거장의 구도는 거의 일치한다. 루벤스는 예수 중심으로 예수 죽음을 그렸고 렘브란트는 예수 뿐 아니라 주변인물까지도 그렸다. 렘브란트는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 사람까지도 빛으로 그려놨다. 이게 요한복음 19장이다. 붉은 옷 입은 남자는 예수에게서 떨어져 있고 십자가 위에 두 남자는 손에 박힌 못을 빼낸다. 가슴이 아프다. 이미 운명하셔서 고통을 느낄 수 없으셨겠지만 못을 빼내는 장면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오른쪽에 창백한 얼굴은 어머니 마리아다. 예수가 누군지 수태고지를 통해서 이미 알았던 마리아이지만 인간 예수의 아머니이기도 했다. 마리아는 예수가 가는 길을 제대로 알았을까? 몰랐을까?
아랫 부분에는 예수의 누일 자리를 준비하는 여성을 그렸다.
재판이 끝나고 십자가에 메달리셨을 때 그 자리에는 요한 뿐이었다. 나머지 11사도중 한명인 유다는 자결했고 나머지 10명의 사도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예수의 재판과 십자가의 고통에 함께 한 제자들이 누구인가? 증인으로 섰어야 할 베드로는 세번 부인하고 사라졌다. 겟세마네에서 일어나 함께 가자고 했던 주님의 권면을 뒤로하고 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없었다.
요한복음 19장
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은휘하다는게 무슨 뜻인가? 꺼리끼어 감추거나 숨기다라는 뜻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밝혔을 때 유대인들이 어떻게 할지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가 예수의 제자임을 밝히지 않고 숨겼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후에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겠다고 했다.
사도들이 빌라도에게 간게 아니다. 아미마대 요셉이라는 한 사람이 빌라도에게 갔던거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밝히고 시체를 달라고 했다. 십자가형을 당한 이들은 십자가에서 내리지 않았고 내렸다 하더라도 땅에 묻지 않고 그냥 버렸다. 그래서 짐승들이 그 시체를 뜯어 먹게 했다. 그런데 아마마대 요셉은 그 시체를 달라고 한거다.
그리고 니고데모 또한 예수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했던 자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구원에 대해서 물었던 자다. 그런 그가 변화되어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다.
사도들이 예수의 장례를 준비했는가? 아니다. 성경에 진리를 알고자 찾아왔던 자들 하지만 주인공이 아닌 자들이 와서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다. 주인공인 사도들은 어디에 있는가? 버림 받은 예수님..
이 처럼 렘브란트는 요한복음 19장을 깊이 묵상하고 그림을 그린듯 하다.
횃불을 들고 예수를 비추는 젊은이가 누구인가? 그가 렘브란트이다. 화가들은 그림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놓기도 한다. 사건의 진실성과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려는 건데 그림 속에 직접 등장한다. 그는 예수의 시체를 밝힌다. 예수의 시체를 밝히는 이는 렘브란트였다.
루벤스는 예수님을 근육질로 그렸지만 렘브란트는 예수의 보잘 것 없었던 그 육체를 그대로 그려 놓는다.
하지만 이것만 봐서는 안 된다. 자세히 보면 오른쪽 아래에는 어둠 속에 검은 개와 가시 덤블이 있다. 개는 충성을 가시 덤블은 고통을 말 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게 무엇인가?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간 우리의 죄, 그 죄로 부터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요구 되는게 무엇인가? 충성이다.
언제 이 그림을 볼 기회가 있을지….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다.
장재형목사 사순절 묵상 ‘십자가의 길’
[출처] 장재형목사의 ‘십자가의 길’묵상 – 렘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작성자 gracefulday79